[문화카페] 기억의 산물로서 박물관과 상처 입은 영웅

지난주에 남해로 답사를 다녀왔다. 겨울 방학이 시작된 지 한참이 지났지만 아직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았다. 막상 답사를 떠날 시간이 다가오자 전날까지도 계속 망설이며 고민했다. 사실 나는 결정하기 어려운 일이 있으면 시간에 맡긴다. 시간이 흔들리는 마음을 정해주는 경우가 많다. 여전히 적절한 순서를 정하지 못하고 있다면 처음 그 순간 정한 것을 번복하지 않는다. 모든 망설임은 끝이 있고 나는 이제 답사를 가야 한다. 다음 날 아침이 되자 그냥 모든 것들을 한순간 멈춰버리고 급히 몇 가지만 챙겨서 떠났다. 사실 정약용이 유배생활을 했던 강진을 간다는 것만 기억났다. 나는 지금 가지 않으면 언제 강진에 갈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이가 들면서 지금 하지 않으면 못한다는 생각이 점차 강해졌다. 언제 지금 이 순간이 멈추고 미래에 다가올 ‘지금’들이 사라질지 모른다.

첫날 오후에 강진에 도착해서 보니 다산초당과 다산박물관을 돌아보는 일정이 준비되어 있었고, 다음 날 통영에 있는 윤이상 기념관과 박경리 기념관을 들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지금 와서 보니 다산의 경우는 ‘박물관’이지만, 윤이상과 박경리의 경우는 ‘기념관’이었다. 솔직히 당시에는 박물관이나 기념관의 차이를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모두 특정 인물에 초점을 두고 있어 유사해보였기 때문이었다. 박물관이나 기념관은 한 가지 공통점을 가지는데 모두 ‘기억’과 연관된다. 박물관(Museum)은 어원적으로 ‘뮤즈의 집’(Museion)이다. 뮤즈들은 그리스어로 학문과 예술을 관장하는 무사 여신들(Musai)이며 ‘기억’의 여신 므네모쉬네(Mnemosyne)의 딸들이다. 기념관(Memorial)도 ‘기억’을 의미하는 므네메(Mneme)에서 유래되었다. 박물관이나 기념관은 모두 누군가 또는 무언가를 ‘기억’하는 것과 관련된다. 누군가 또는 무언가를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는 박물관이나 기념관의 목적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나는 답사에서 우연히 연속적으로 만나게 된 정약용, 윤이상, 그리고 박경리를 기억하면서 문득 아주 평범한 공통점을 발견했다. 사실 기억은 과거에 일어났던 것을 대상으로 삼지만 실제로는 현재에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기억의 대상은 과거에 있지만, 기억의 주체는 현재에 있다. 그래서 기억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 여기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나는 이번에 박물관과 기념관에서 만난 위인들을 통해 특별한 경험을 했다. 과거에 그들은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타자’로서 존재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인생의 여정에서 만난 또 다른 ‘나’처럼 느껴졌다. 그들이 만든 놀라운 업적이 아니라 그들이 겪은 삶의 고난과 역경이 내 마음에 먼저 들어왔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의 삶의 서사를 보며 연민과 공포를 느끼면서 나의 고통을 치유하는 경험을 했다.

세네카는 ‘왜 선한 사람들에게 많은 불행이 닥치는 것처럼 보이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엄밀히 선한 사람들에게 불운이 닥칠 수는 없다고 한다. 선한 사람들에게 닥치는 고난과 역경은 나쁜 것이 아니라 좋은 것이다. 그것은 선한 사람들을 시험하고 단련시키기 때문이다. 세네카는 오히려 운명과 싸우며 우리 자신을 강하게 만들라고 한다. 우리 자신이 위대한 사람인지는 운명의 여신이 고난과 역경을 통해 기회를 주지 않으면 아무도 알 수 없다.

내가 박물관에서 만났던 사람들은 단순히 놀라운 업적 때문에 위인들이 아니라 불굴의 정신 때문에 진정한 ‘영웅’들이었다. 그들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누구보다 더 많은 고난과 역경을 딛고 일어난 사람들이다. 나는 살아가면서 내게만 일어났다고 생각했던 수많은 불운들에 대해 항상 반추해 보았다. 내게는 힘든 기억들이지만 나를 혹독하게 단련시켰고 작은 것에서 기쁨과 감사를 느끼게 했다. 나는 박물관에서 수많은 고난들을 견디었던 상처 입은 영혼들에게 위로를 받고, 그 잔인하고 척박한 삶 속에서도 꽃피어낸 작품들에 감동을 받았다. 박물관이 우리의 서사적 상상력을 통해 공감받고 치유되는 공간으로 발전하기를 소망한다.

장영란 한국외대 미네르바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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