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평섭 칼럼] 막힌 곳 뚫겠다던 어떤 總理

1980년 9월20일. 제10대 국회가 계엄령 속에 임기도 마치지 못하고 폐회되는 날이었다. 의장석에는 백두진 의장이 전 해에 있었던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으로 사임하고 민관식 부의장이 의장직무대리로 의사봉을 잡았다.

그해 봄, 소위 5ㆍ17사태로 국회의원 29명이 구속되거나 의원직을 잃는 등 수난을 겪으며 국회는 죽은 시체나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이날 마지막 국회에 출석한 의원도 재석 231명 중 202명만이 자리를 지켜 더 없이 침통한 분위기였다. 이날 마지막 10대 국회를 마감하면서 행한 민관식 부의장의 연설은 지금도 역사적인 명연설로 평가될 만큼 감동적이었다.

“…의원 여러분! 우리 의사당 바로 옆에는 태고(太古)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 민족의 영욕과 애환을 싣고 소리 없이 흐르는 한강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습니다…저기 비어있는 많은 의석을 바라보면서 이 자리에 서있는 본인의 심경은 지난날에 대한 비감으로 어둡고 그늘져 있음을 실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많은 의원들이 지그시 눈을 감고 이 연설에 귀를 기울였으며,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는 의원들도 있었다. 그런데 이날 의사당을 떠나면서 대부분의 의원들이 그동안 벌였던 원색적인 정쟁을 뼈아프게 후회했다고 당시 언론들은 보도했다. 그러나 다시 11대 국회가 시작되고 12대, 13대… 국회가 계속되지만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 국회가 변한 것은 세비가 많아졌다는 것뿐 정쟁은 변함이 없다.

지난 19대 국회 때 회기 중 발의됐으나 처리를 못해 자동 폐기된 법안이 1만 96건이나 되었다는 사실이 우리 국회가 정쟁에 묶여 꼼짝도 못했음을 말해준다. 그들 대부분이 민생법안이라는 데서 더욱 울화가 치민다. 이번 20대 국회 역시 1년여 남은 임기 중 얼마나 민생법안에 올인할 것인지, 그리하여 또 얼마나 많은 법안이 자동 폐기될지, 지금으로서는 비관적이다.

건전한 정쟁이야 민주주의 발전에 필수 영양제다. 문제는 조선 왕조를 병들게 하고 무너뜨린 사색당파-그 고약한 악성 DNA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죽이고, 살리고, 끝없이 되풀이 되는 사색당쟁에 사도세자까지 제물로 바친 영조 임금이 ‘탕평책’을 내걸고 그 악성 DNA를 퇴치하려고 했지만 실패로 끝나지 않았는가.

지금 우리는 모두가 꽉 막혀 있는 심각한 상황에 놓여 있다. 유치원에서부터 대학입학제도에 이르기까지 모든 교육문제가 그렇고, 북한 핵문제에서부터 안보에 이르기까지 밤길을 걷는 마음이며, 고용과 경제문제는 가장 심각한 지경이다. 어느 것 하나 시원하게 뚫리는 것이 없다. 거기에다 쉴 새 없이 이어지는 화재를 비롯한 안전사고는 더욱 불안하게 한다.

무엇 하나 시원하게 뚫리지 않는 이 현실에서 우리는 2019년 새해를 맞는다. 그리고 삼부요인과 정치인들부터 지방, 군수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그럴듯한 미사여구로 새해 희망을 역설한다. 그러나 국민들 귀에는 해마다 새해가 시작되면 으레껏 되풀이 되는 이벤트로 밖에 들리지 않는다.

오래전 어떤 고명하신 국무총리가 총리 취임사에서 ‘막힌 곳을 뚫겠다’고 했다. 그러나 얼마 못가 자리를 물러날 때 ‘막힌 곳을 뚫겠다더니 오히려 더 막혔다’는 반응이 나왔고 너무 막힌 곳이 두터워 뚫다 말았다는 평도 나왔다. 그렇게 우리 정치의 벽이 두텁다는 이야기다. 정치발전을 가로막고 있는 당쟁의 고약한 DNA, 그 벽을 뚫는 새해가 되길 소망해 본다.

변평섭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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