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공산당이 좋아요!”
미국 워싱턴 광장이나 일본 도쿄에서 누군가 이렇게 외쳤다면 지나던 시민들이 그 흔한 1인 시위꾼의 하나이거나 유사종교의 홍보맨으로 여기고 그냥 지나쳐 버릴 것이다.
하물며 그것이 신문에 보도되는 기삿거리로 취급도 않을 것이다. 나라가 분단되어 수십 년 피터지게 대결하지도 않았고 자유 민주주의가 튼튼하게 뿌리내려 있어 그런 소리쯤 모깃소리 정도로 치부해 버리기 때문이다.
“김정은은 위인이다!” 하고 외쳐도 그저 희화한 어느 집단의 구호로 생각하고 말 것이다. 사실 그동안 국제사회에서 김정은의 이미지는 그렇게 희화화됐다.
공영방송에서 ‘오늘밤 김제동’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김정은 서울 답방을 환영하기 위한 단체 ‘위인맞이 환영단 김 모 위원장’의 김정은 찬양 발언을 여과 없이 내보낸 것도 우리나라에서는 분란을 일으켰지만, CNN이나 NHK, BBC에서 만약 그랬다면 이야깃거리에 오르지도 않을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고등학교 교실에 북한 인공기가 20일이나 걸려 있는 상황까지 이르렀어도….
하지만 우리는 미국이나 일본과 다르다. 우리는 북한의 남침으로 국토가 처참하게 짓밟혔고 엄청난 국민이 피를 흘렸으며 휴전 이후에도 그 도발을 멈추지 않아 고통을 겪으며 살아왔다.
그런데 갑자기 교실에 인공기가 등장하고 대한민국 수도 서울 한복판에서 김정은이 위인이며 공산당이 좋다고 떠드는 것은 참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다.
물론 통일을 반대할 사람은 없다. 남북화해를 반대할 사람도 없다. 김정은의 서울 답방이 비핵화에 도움이 된다면 더욱 좋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 통일이 되고 북한의 핵폭탄이 없어질 것인가. 오히려 남북 관계에 환상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층이나 청소년들에게는 교실에 걸려있는 인공기, 광화문 광장에서 외치는 김정은 찬양, 그런 방송을 접할수록 핵무기는 아무것도 아니고 김정은 그 자체에 빠져들 위험성이 있다.
이것이 핵무기보다 더 무서운 공산주의의 선동선전술이기 때문이다.
‘묵비사염(墨悲絲染)’이라는 말이 있다. 글자 그대로의 뜻은 깨끗하고 하얀 실이 검은 먹물에 물드는 것을 슬퍼한다는 뜻이다. 또는 실이 검게 물드는 것을 묵자(墨子. 중국 춘추전국시대 초기의 사상가)가 슬퍼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정말 하얀 실이나 옷감이 검은 먹물에 닿으면 아주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실오라기 하나에서부터 스며들어 어느 사이에 모두를 검게 물들어 버리는 것을 보게 된다. 인간의 사념(思念)도 이와 같이 물들게 된다는 것을 비유한 것인데 참으로 적절한 표현이다.
사실 한 단체나 조직의 슬로건이나 구호를 계속 반복하여 외치면 구성원 의식 속에 ‘먹물이 실을 물들이 듯’, 어느 사이에 그렇게 의식화된다. 후진국이나 독재국가일수록 구호가 많은 것도 그런 목적이 강하다.
뿐만 아니라 지도자의 이름 앞에 ‘위대한 ○○○’ 또는 ‘영도자 ○○○’하는 수식어를 붙이는 것도 ‘묵비사염(墨悲絲染)’처럼 그렇게 국민의 뇌를 물들이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지난 10월 경기도 고양시에서 발생한 초대형 유류탱크 폭발사고로 국민들이 크게 놀랐지만 사고 원인은 한 외국인 근로자가 날린 풍등 불씨, 아주 조그만 불씨가 옮겨붙어 발생한 것으로 알려졌다. 바로 이런 것이 ‘묵비사염(墨悲絲染)’이다.
더욱 걱정스러운 것은 김정은 답방 전부터 이런 식으로 시작된 남남갈등이 어떻게 번질까 하는 것이다. 남남갈등의 또 하나의 ‘묵비사염(墨悲絲染)’이다.
변평섭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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