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카페] 다시 새해를 맞이한다

다시 새해를 맞이한다. 새해가 되면 누구나 ‘새로운’ 일을 계획한다. 특별히 새해에 하고 싶은 일이 있는 것이 아닐 때에도 막연히 새로운 일을 해야 할 것 같아 부산해지기도 한다. 왜냐고 묻는다면 ‘그냥 새해니까’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그런데 새해가 계속해서 반복되면 새해라는 말도 왠지 시들해진다. ‘새’해라는 말이 무색하게 ‘다시’ 새해가 돌아오기 때문이다. 왜 우리는 매번 새해(New Year)라고 부를까? 정말 새해라고 생각해서, 아니면 새해가 되길 바라기 때문일까? 사실 모든 시간은 새로운 시간이다. 우리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지나쳐온 시간은 모두 처음 맞이하는 시간이다. 모든 사람에게 시간은 양적으로 동일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매 시간을 어떻게 경험하느냐에 따라 질적으로 전혀 다르게 된다.

사람은 동일한 시간을 되풀이할 수 없다. 시간은 지나가면 되돌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억’을 통해 무수히 과거로 되돌아가지만 과거 자체는 변화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과거로 돌아갈 수 있기를 꿈꾼다. 참담한 현실을 바꾸고 싶을 때는 더욱 간절하다.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다른 선택을 하리라 다짐하면서 말이다. ‘만약 그렇게 했다면’이라는 후회는 항상 긴 그림자를 남긴다. 후회(後悔)에는 이미 시간이 지나버렸다는 인식이 포함되어 있다. 사람은 생각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후회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만 후회의 늪에 빠져 있어서는 안 된다. 시간은 멈추지 않고 흘러가기 때문이다. 결코 변화시킬 수 없는 과거를 두 손으로 꽉 움켜잡고 아직 변화시킬 수 있는 현재와 미래를 놓쳐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된다.

문학작품이나 드라마 및 영화에서 과거로 돌아가는 테마는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고전적으로 ‘타임머신’(time machine)을 만들어 과거로 시간여행을 하는 것부터 최근에는 시공간의 왜곡으로 인한 타임 슬립(time slip)도 자주 사용하는 장치이다. ‘타임머신’, ‘백 투 더 퓨처’, ‘터미네이터’ 등과 같은 영화는 과거와 미래를 오갈 수 있는 기능을 통해 과거로 돌아가 현재나 미래를 바꾸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그렇지만 현실을 변화시키기 위해 첨단과학기술을 반드시 동원할 필요는 없다. 서사적 상상력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에서는 스크루지에게 나타난 유령들이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보여주면서 결국 다시 시작된 현재를 변화시키고 있다.

우리는 과거로 돌아가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수고를 굳이 겪지 않아도 된다. 지금 바로 변화시킬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있다. 바로 우리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현재 내가 처해있는 현실을 바꾸기 위해 과거로 돌아가 ‘전 우주’를 바꾸려는 시도를 한다고 해도 인간의 인식 능력으로 인해 예측 불가능한 결과에 도달할 수 있다. 더욱이 현실적으로 여전히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우리 자신을 변화시키는 일은 전 우주를 변화시키는 일보다는 훨씬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사람들은 새해를 맞이하여 신년하례식을 한다. 고대인들은 종교적으로 신년제의를 성대하게 치렀다. 세계 모든 지역에서 시기는 다르지만 신년제의가 있었다. 엘리아데에 따르면 새해는 우주창조를 재연하는 것이므로 거기에는 시간을 그 시초에서부터 다시 한 번 출발시키는 것, 천지창조의 순간에 존재하였던 원초적 시간, ‘순수한’ 시간을 회복하는 것이 포함된다. 새해는 단순히 새로운 시간이 시작되는 것만이 아니라 지난 시간을 소멸시키고 ‘정화’시키는 의미가 있다. 현재를 바꾸기 위해 타임머신을 이용하거나 타임 슬립을 할 필요까지는 없다. 우리에게 새해는 항상 다시 돌아온다. 그렇지만 새해를 맞이하는 우리가 정화되어야 진정으로 새해가 온다.

장영란 한국외대 미네르바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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