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카페] 타인의 마음을 읽는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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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사회에서 말은 소통의 수단이다. 그래서 말을 정확하게 사용할 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말을 정확하게 사용하기만 한다면 다른 사람에게 우리 생각을 잘 전달할 수 있을까? 사실 말을 정확하게 사용하려는 이유는 사람들 간에 벌어지는 오해를 최소한으로 줄여 보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일상에서 대화할 때는 사실 ‘누구인지’, ‘무엇인지’를 정확히 지시하지 않을 때도, 심지어 단어 한마디만 내뱉어도 의사소통이 되는 경우도 있다. 반대로 아무리 문장을 완벽하게 구사하며 설명을 하더라도 이해시키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장시간에 걸쳐 대화를 하더라도 전혀 소통이 되지 않는 답답한 상황도 벌어진다.

 

말은 사람의 보이지 않는 생각을 보여줄 수 있지만 전부 담아낼 수는 없는 작은 그릇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다른 사람의 생각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말’에 집착하게 되고 수많은 상처를 입는다. 셰익스피어 작품 속의 리어왕은 세 명의 딸에게 재산과 권력을 나눠주는 조건으로 자신에 대한 사랑을 말로 표현하라고 명령한다. 첫째 딸 고너릴은 리어왕에게 “제 사랑은 말로 표현하지 못합니다. 모든 한계를 넘어 전하를 사랑합니다”라고 말한다. 둘째 딸 리건은 영리하게도 여기에 추가하여 아버지의 사랑 안에서만 “행복”하다는 단서를 달아 고너릴을 다시 넘어서고 있다.

 

리어가 가장 사랑하는 셋째 딸 코딜리어는 모든 사람의 기대를 저버리고 할 말이 “없다”고 말한다. 리어왕은 미칠 듯이 분노하여 고너릴과 리간에게만 왕국을 절반으로 나눠 물려주고 코딜리어는 빈손으로 내쳤다. 고너릴과 리간은 리어왕이 원하는 대답을 했지만 진실이 아니었고, 코딜리어는 리어왕이 원하지 않은 대답을 했지만 진실을 말했다. 진실이 항상 승리하지 않는 것은 사람들이 알고 싶은 것이 때로는 진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리어왕의 비극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말로 표현하라고 요구하는 순간에 시작되었고, 말이 곧 말하는 사람의 마음을 그대로 보여준다고 믿었던 순간에 이미 파국에 이르렀다. 리어왕은 스스로 함정을 파놓고 자기 자신이 빠지고 마는 실수를 범한다.

 

우리는 ‘장미’라는 이름으로 어린왕자가 사랑하는 꽃을 지시할 수 있지만, 단지 장미라는 말로만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언어는 존재의 의미를 모두 담아낼 수 없으며, 사유의 내용을 모두 전달할 수 없다는 태생적 한계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말이나 글은 근본적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이나 우리가 사유하는 것들 중 어떤 일부나 특정한 부분만 보여줄 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말을 통해서는 사유의 단편만 알 수 있을 뿐이다. 더욱이 말은 그 자체로 독립적이지 않다. 그것은 말하는 사람에 의해 달라질 수 있다. 그가 어떤 목적을 가졌는지에 따라 말은 전혀 다른 것을 보여줄 수 있다. 그것은 누군가의 진실이 아닌 거짓을 보여줄 수 있는 가능성도 많다.

 

그렇다고 우리가 다른 사람의 생각을 훤히 들여다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정신을 빙산에 비교하면서 의식은 바다 위로 돌출된 표면이지만, 무의식은 바닷속에 잠겨 보이지 않는 실체라 말한다. 인간의 영혼 속은 헤아릴 수 없는 깊이와 넓이를 가지고 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그대는 모든 길을 다 밟아보아도 영혼의 한계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라고 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생각은 물론이고 심지어 자기 자신의 생각조차 알기 어려울 때가 많다. 결국 타자와 소통할 때 ‘말’은 수단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말은 단지 우리의 영혼을 보여주는 창문이다. 우리가 무엇을 보아야 할지는 각자의 역량에 달려있다. ‘인간’이란 존재의 본성을 얼마나 깊이 이해하고 있느냐가 관건이다.

 

장영란 한국외대 미네르바교양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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