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레말큰사전으로 남북의 언어 통일 꽃 피울 것”
남북 분단 이후 교류가 단절되면서 각자의 공간에서 새로운 단어들이 많이 만들어졌다. 같은 언어 체계를 공유하지만 이제는 남한 사람이 북한 말을 일부 알아듣지 못하는 상황도 생긴다. 교류가 단절되면서 언어마저도 남과 북으로 나뉘어진 상태에 이른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통일이 된다면 한 민족이 언어를 공유할 수 없는 ‘반쪽짜리 통일’이 될 수 밖에 없다. 이를 대비해 지난 2005년 남북의 언어학자들이 ‘겨레말큰사전 남북공동편찬위원회’를 결성했다. 민족 동질성을 되찾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의사소통 근간이 되는 언어 통합이 필요하다는 데 남북 양측 정부가 공감했기 때문이다. 남측 위원회는 사전편찬전문가 및 문인이며, 북측은 주로 사회과학원 언어학연구소 인력으로 구성돼 있다. 이들은 어휘 전반에 걸친 협의를 지속적으로 하며 남북 겨레가 함께 이용할 수 있는 어휘를 만들어나가고 있다. 제572돌 한글날을 앞두고 지난 7일 본보가 만난 한용운 겨레말큰사전 남북공동편찬사업회 편찬실장은 “겨레말큰사전은 남북언어통일의 근간이며 통일 이후 남북 겨레가 함께 이용할 최초의 사전”이라고 설명했다.
Q 겨레말큰사전이 갖는 의미.
A 사전이라는 것은 민족의 이력서라고 생각하면 된다. 우리가 어느 지방에서 태어나고 어떻게 성장했는지를 이력서에 나와있듯이 단어에도 이력이 있다. 사전은 한 단어가 어떤 뜻으로 쓰였는지 밝혀 기재돼 있다. 남과 북의 경우 분단 이전에 같은 뜻으로 쓰였던 낱말들이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라면서 뜻이 달라진 것들이 많다. 전문용어의 경우 65%가 다르다. 컴퓨터, 전산, 식물, 동물, 역사, 수학 등등 언어가 달라 북한 사람이 남한의 사전을 참고하려고 해도 할 수 없다. 남한도 마찬가지다. 각기 만든 사전을 참조할 수가 없다. 그래서 남북 사전 편찬가들이 만나서 함께 사용하는 사전을 만들자는 의미로 편찬하게 된 것. 겨레말큰사전의 목적은 남북언어통일에 있다. 남북 어휘 차이를 정리해서 향후 통일시대의 어문 규범의 토대를 마련한다는 데 의미가 있다. 일제 강점기에 표기법을 마련하고 사전을 편찬해 광복 이후 큰 어려움 없이 교과서를 편찬하고 공문서를 작성할 수 있었던 것처럼 겨레말큰사전이 통일 이후 그러한 역할을 할 것이다.
Q 겨레말큰사전의 시작 배경은.
A 1989년 문익환 목사가 평양을 방문했다. 당시 김일성 주석에게 ‘통일국어대사전’을 남북이 함께 편찬하자는 제안을 했고 이것이 겨레말큰사전의 편찬 계기가 됐다. 그 이후 여러 사정으로 사업 진척에 어려움을 겪다가 지난 2005년 2월께 ‘겨레말큰사전 남북공동편찬위원회’가 결성되면서 편찬 사업이 본 궤도에 올랐다. 남측 위원회는 ‘표준국어대사전’, ‘우리말큰사전’, ‘고려대 한국어대사전’, ‘연세 한국어사전’ 편찬자들과 문인들로 구성돼 있고 북측 위원회는 주로 사회과학원 언어학연구소 인력으로 구성돼 있다.
겨레말큰사전은 남북 학자들이 함께 만들고 남북 겨레가 함께 이용하게 될 최초의 사전이다. 북한 사람은 남한 사전을 볼 수 없고 남한 사람은 북한 사전을 볼 수 없다. 서로 어휘에 대해 참조할 수 있는 자료나 사전이 없는 상황이 지속되면 남북 어휘 이질화는 심화될 수밖에 없을 것. 따라서 분단된 상황에서 남북 겨레가 함께 이용할
사전을 편찬해 상대 측 어휘를 쉽게 접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할 목적으로 사전을 편찬하고 있다.
Q 현재 어디까지 진행됐나.
A 78% 정도 진행됐다. 33만 개 낱말이 수록된다. 남과 북의 편찬가들이 만나서 단어를 통합하고 교정하고 있다. 뜻에 차이가 있는 것들은 각기 풀이하고 상호 검토한 후 직접 만나서 합의를 하는 과정을 거치고 있다. 현재 25회차까지 회의를 진행했다. 회의는 개성, 금강산, 평양 등 북한에서도 많이 진행했고 남북관계가 안 좋을 때는 북경 등 중국에서도 많이 진행했다. 관계가 안 좋아도 이 사업은 김일성 주석의 유언 사업이기도 하기에 북한도 반대할 명분이 없는 남북 공동 사업이다.
남북관계가 좋았다면 내년께 종이사전으로 출판할 수 있었을 텐데 2010년 이후 남북 관계가 경색되면서 전체 일정에 차질을 빚게 됐다. 북한의 편찬가들은, 우리로 빗대서 말하면 일종의 공무원들이다. 지금은 남북 관계가 좋아졌지만 남북 정상회담, 북미 정상회담 등 정상회담 추진에 북한 인력들이 모두 투입돼 있는 상태라 조금 진전이 더딘 편이다. 지금은 26차 회의를 하기 위해 북쪽에 미팅 요청 팩스를 넣어 놓은 상태다. 이제 정상회담 일정이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되면 회의를 한 번 더 가질 예정이다.
Q 남한말과 북한말, 어느 정도 차이 있나.
A 현재 남북은 언어 체계 면에서는 거의 차이가 없다. 다만 어휘와 표기법에서 차이가 난다. 흔히 ‘언어 이질화’라고 보면 된다. 특히 남북 사전 표제어를 비교하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일반어의 경우 35% 정도 차이가 있는 데 비해 전문용어는 65% 차이를 보인다. 같은 분야에 몸담고 있는 남북 전문가들이 모였을 때 한쪽에서 10개의 단어를 말하면 상대 쪽에서는 3개 정도만 알 수 있을 정도다. 예컨대 남북은 ‘신사’, ‘소행’, ‘어버이’처럼 일상적인 말에서도 어감이 서로 다르거나 뜻에 차이가 있다. ‘낙지’와 ‘오징어’처럼 가리키는 말이 서로 상반되기도 한다. 전문 용어의 경우 페널티킥/십일메터벌차기, 치통/이쏘기, 합병증/따라난병, 엑스선/렌트겐선 등 차이가 난다. 한민족이지만 서로 의사소통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문화와 사고방식의 기초가 되는 언어 통합이 무엇보다 우선돼야 한다. 언어 통합 없이 통일이 될 경우 의사소통에 문제가 발생할 수 있고 이렇게 되면 서로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질 수 있어 민족 통일을 가로막는 큰 장애가 될 수 있다.
Q 같은 한글 창제를 두고 남북한의 한글날이 다른데.
A 남한의 한글날은 10월9일이고, 북한의 한글날은 1월15일이다. 북한에서는 한글날을 ‘조선글날’이라고 부르는데 우리처럼 훈민정음 반포일을 기준으로 하지 않고 창제일을 기준으로 삼아 기념한다. 남북한의 한글날이 다르기 때문에 우리 사업회에서도 같은 날, 의미를 함께 공유하는 행사 등을 북한과 하지 않고 있다. 기념 행사를 열려면 한글날 일정 등의 조율이 필요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부분이라 한글날이면 이러한 아쉬움들이 있다.
Q 최근 염무웅 겨레말큰사전 남북공동편찬사업회 이사장이 특별수행원으로 평양에 다녀왔는데.
A 지난달 18일 진행됐었던 평양 남북정상회담에 염무웅 이사장이 특별수행원 자격으로 다녀오셨다. 북한의 사회과학원언어학연구소의 인력을 만나진 못한 것 같다. 그러나 그 사업을 보장해주는 보장성원(지원인력)을 만나 그간 진행한 남한의 사전 편찬작업, 준비사항 등을 전달한 것으로 안다.
Q 향후 계획은.
A 겨레말큰사전이 종이사전으로 출판되면 수정, 증보 작업을 진행해야 한다. 한국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 과정이 반영된 주민등록 등본의 구성이 매년 달라지듯, 우리말 생사를 기록하는 사전도 정기적으로 수정, 증보 작업을 할 필요가 있기 때문. 아울러 겨레말큰사전 내용을 전자사전 형식으로도 제공할 계획이다. 이외에도 분야별 전문용어 사전 편찬 등 남북언어통합 위한 여러 가지 일을 계획하고 있다. 겨레말큰사전 편찬가들은 사명감을 가지고 한다. 돈을 많이 버는 일도 아니다. 남과 북, 오롯이 사명감을 가지고 일하고 있다. 그간 오랫동안 이 사업이 진행되면서 이직한 직원들도 있고, 돌아가신 분들도 있다. 많은 일들이 일어났지만 어쨌든 최선을 다해서 사전을 만들고 있다. 국민들이 겨레말큰사전에 관심을 많이 갖고 응원을 해주셨으면 좋겠다.
허정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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