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평섭 칼럼] 700년 百濟가 5일 만에 무너진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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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660년 7월, 그해 여름도 무척 더웠다.

 

그러나 백제의 왕도 사비성(지금의 충남 부여)은 의자왕의 독선과 아집, 권력층의 분열로 내홍을 앓고 있었지만 겉으로는 평화로웠다. 부소산 낙화암 아래 백마강에서는 여기저기 흥겨운 뱃놀이가 벌어지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사비성의 평화를 깨뜨리는 급보가 전해졌다.

소정방이 이끄는 당나라 10만 대군이 사비성의 관문 기벌포(지금의 금강 하구·충남 서천군 장항읍)에 물밀듯 상륙을 시작했으며, 백제의 동쪽 탄현(지금의 大田 계족산성 일대)에는 김유신이 이끄는 5만 신라군이 쳐들어오고 있다는 급보였다.

 

그 순간 백제는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의자왕을 비롯, 모두가 우왕좌왕 갈피를 잡지 못했고 백성들은 도성을 빠져나가느라 정신이 없었다.

 

전혀 예기치 못한 때에, 전혀 생각도 못한 상황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백제는 신라가 감히 침공해 오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더욱이 당나라가 신라와 손잡고 황해를 건너오리라고 상상도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 당시 신라보다 국력이 월등했던 백제였고 특히 의자왕은 즉위 후 신라의 100여 성(城)을 빼앗았는데, 이는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점령한 64개 성보다 월등히 많은 전과였다. 그러니 백제는 국가안보에 느긋해졌고 안일한 생각을 갖지 않았을까? 거기에다 당나라는 전통적으로 백제와 깊은 외교ㆍ문화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백제를 배신하여 신라와 연합군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바로 이와 같은 백제의 방심을 완벽하게 이용한 것이 신라와 당나라였다.

신라는 늘 괴롭힘을 당하는 백제를 멸망시킴으로써 신라의 생존을 도모하고 당나라는 한반도의 분쟁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지배 영역을 확보하려는 계산에서 신라와 손을 잡은 것.

그때나 지금이나 이렇듯 국제관계는 자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배반도 하고 손도 잡고…. 영원한 동맹도, 적도 없다는 것 아닌가.

 

특히 자만에 빠진 의자왕은 처음에 가졌던 리더십을 잃고 점점 향락으로 세월을 보내는가 하면 충성스러운 대신을 귀양 보내는 등 극심한 일탈행위를 이어갔다.

 

이에 대해 최근 ‘삼국통일 어떻게 이루어졌나’라는 연구서를 발행한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이도학 교수는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을 오만과 교만, 갈등과 분열 등, 사회적 통합의 실패에서 원인을 찾고 있다. 그러면서 이 교수는 근본적인 백제의 멸망 원인은 ‘정신력’임을 거듭 강조한다.

 

생각해 보면 660년 7월10일, 나당 연합군이 사비성(부여)을 함락하고 웅진성(지금의 충남 공주)로 도망간 의자왕이 항복하기까지 불과 5일 밖에 걸리지 않았음이 이 교수가 지적한 백제 최후의 ‘정신력’이 얼마나 한심했던가를 짐작게 한다.

 

특히 당나라에 붙잡혀 간 의자왕이 묻혀있는 중국 낙양 북망산에 가면 1300여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그 시절의 회한이 눈앞에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온다.

 

그렇게 백제의 최후는 허망했다. 그리고 그것은 의자왕 스스로가 몰고 온 운명이 아니었을까?

이번 주 금요일(9월14일)부터 충남 공주와 부여 일원에서 ‘한류 원조, 백제를 즐기다’라는 주제로 제64회 백제문화제가 풍성하게 열린다. 노래와 춤, 그리고 계백장군을 비롯해 성충, 흥수 등 세 충신에 대한 제향도 올리며 백마강에 몸을 던진 백제 궁녀들의 원혼도 위로하는 행사도 갖는다.

 

백마강이 내려다보이는 낙화암에서 눈을 감고 백제 최후의 모습을 상상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변평섭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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