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카페] 근육론

▲ 박설희
▲ 박설희

세상의 중심은 내가 있는 곳이고 내 중심은 몸이 아픈 곳이다. 몸이 아프면 모든 신경이 그리로 쏠린다. 그래서 어떤 시인은 “아픈 곳에 자꾸 손이 간다”는 시를 지었나 보다. 손만 갈까, 지속적으로 아프면 온갖 감각이 그리로 향하고 심지어 망상이 자리를 잡기까지 한다. 사람이 자신에게 몸이 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는 것은 어딘가 불편해질 때부터이다.

허리가 아파서 이삼 년 고생한 적이 있다. 몸도 기우뚱하니 직립이 안 될뿐더러 앉으나 서나 괴롭고 심지어 누워서도 통증 때문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허리 통증으로 죽었다는 사람은 없으니 죽지는 않겠지만 이렇게 살아서 뭘 하나 하는 비관적인 생각까지 들었다. 온갖 치료와 약이 무익했다. 원인은 디스크 파열로 신경이 눌려서라는데 주변에선 재발이 쉽다며 수술을 말렸다.

허리 통증에 용하다는 사람들을 찾아다닌지 반 년이 지날 무렵 심신이 지칠 대로 지친 나는 어느새 집 앞 정형외과 진료실에 다시 앉아 있었다. 그때 의사선생님 왈 “수영하세요.” 수영을 배운 적이 없었고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어야 하는 복잡한 절차가 너무 싫었던 나는 야단치듯 하는 그분의 채근을 다시 받고서야 굳은 결심을 하고 수영장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래도 중력을 덜 받는 물속에서는 통증이 덜 했으므로 은근과 끈기로 호흡법과 영법을 배웠다. 그런 지 4개월쯤 지났을까. 물 위에 떠 있는데 감쪽같이 통증이 사라졌다. 통증은 슬금슬금 사라지는 게 아니라 갑자기 증발한다는 걸 그때 알았다. 이른 바 기립근이라는 등근육이 그 사이 생겨나서 척추를 지탱해준 것이다. 우리의 중심을 바로잡고 뼈를 지탱하는 데 근육의 역할이 그만큼 크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어디 몸만 그럴까. 우리는 ‘근육’ 하면 아놀드 슈왈제네거 같은 강인한 전사를 떠올리지만 주위를 둘러보면 땅에도 근육이 있다. 사람들이 밟고 밟아서 희고 단단하게 떠오른 길이 바로 그것이다. 시간의 옷을 입은 돌담에도 울퉁불퉁한 근육이 있다. 스러졌다 뭉치는 안개의 근육, 약속 잊지 않고 이맘때 꼭 찾아와주는 꽃의 근육, 누웠다 일어나는 풀의 근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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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에 보이지 않지만 감정이나 생각에도 붙잡아주고 지탱해주는 근육이 필요하다. 그래야 균형 잡힌 생각이나 절제된 감정을 갖게 된다. 삶에 근육이 없다면 어느 날 문득 기우뚱 쓰러져버릴지도 모른다. 하루하루 근근이 연명하는 재미없는 삶을 살게 될 수도 있다. 시에도 근육이 있어야 읽는 이의 마음과 영혼을 흔들어 깨울 수가 있는 것이다. 몸의 근육을 키우기 위해서 근력 운동을 꾸준히 해야 하듯이 보이지 않는 근육들을 위해서 독서나 여행 등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얼마 전에 있었던 일이다. 한글 중급반에 다니며 이제 막 읽고 쓰는 데 재미를 맛보고 있는 분에게 소감을 묻자 다음과 같이 대답하는 것이었다. 

“이제 비로소 실눈을 떴어요.” 

그 순간 “실눈을 떴다”는 표현이 무척 신선하게 다가왔다. 운동에 실눈을 뜨고 공부에 실눈을 뜨고 연애에 실눈을 뜨고 시에 실눈을 뜨면서 우리의 삶이 이어져가는 게 아닌가. 그 분은 지금 언어의 근육을 키우고 있는 것이다. 사정없이 내 가슴을 비집고 들어온 그 언어에 속이 울렁거렸다.

그날 저녁 창밖을 보니 하늘에 떠올라 실눈 뜬 달이 세상을 더듬더듬 읽기 시작하고 있었다. 조금은 컴컴하지만 조용하고 신비로운 푸른빛을 띤 세계가 그 아래 펼쳐져 있었다.

박설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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