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인터뷰] 임진강 거북선 최초 설계자 채연석 UST 전문교수

“지금의 거북선 모형은 엉터리… 제대로 된 복원 이뤄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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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연석 UST 교수(전 항공우주연구원장)는 1993년 조선 세종 30년 개발된 세계 최초 2단 로켓포인 신기전(神機箭)을 최초로 복원해 발사까지 성공한 로켓박사다. 신기전은 채 교수에 의해 원형 그대로 복원되기 전까지는 유물 없이 기록으로만 존재했을 뿐이었다. 

고려 말 최무선이 개발한 청동제 총통까지 복원해 장착된 화약을 폭발시켜 화살을 150여m 날려 보내기도 했던 채 교수가 대한민국 국민은 물론 세계인들도 잘 아는 거북선을 연구하게 된 것은 전국 각지에 전시된 거북선의 복원이 모두 엉터리라는 결론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그의 연구결과를 보면 수긍이 간다. 임진왜란 때 23전 23승의 경이적인 승리를 기록했던 거북선의 전투형태는 돛을 펴고 노를 저어 가다가 왜선과 맞닥뜨리면 돛을 내리고, 노를 저어 왜선에 가까이 접근해 함포를 쏘아 파괴해 제압했었다. 

그런데 그동안 복원된 거북선들은 노를 저어 움직일 수 있는 것도, 함포를 발사할 수 있는 것도 없고 단지 물에 뜨는 모형으로서만 있을 뿐이었다. ‘노’와 ‘함포’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형태만 거북선이어서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 원형과 판이하다는 것이다.

 

채 교수는 자신의 이런 내용을 학문적으로 뒷받침하는 ‘함포(艦砲)의 배치를 중심으로 본 거북선의 구조 연구’를 2015년 10월 제5회 세계과학관 심포지엄에서 발표, 국내외 학자들로부터 주목을 받았다. 함포의 배치를 통해 거북선 구조를 처음 밝혔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채 교수는 ‘파주 임진강 거북선’을 주목하고 있다. 조선 최초라는 역사성을 가졌기에 임진강 거북선은 노를 저어 움직이면서 함포를 쏘는 형태로 복원한 진짜 거북선을 만들어 국내외에 널리 알릴 의무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연구실에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 거북선(1592년)을 기준으로 180여 년 전 조선 최초 태종 때(1413년) 임진강 거북선과 200여 년 후 1795년 거북선 등 3가지 유형의 거북선 설계도를 직접 만들어 보유하고 있다. 국토교통부 항공ㆍ철도사고조사위원회 위원장으로도 활동하고 있는 채 교수를 지난 10일 대전광역시 가정동 UST 에서 만나 임진강 거북선의 역사적 의미 등을 물어봤다.

Q 조선왕조실록에는 조선 최초 거북선이 파주 임진강에서 훈련했다고 기록돼 있다. 조선 초에 등장했던 거북선은 임진왜란 당시 재등장하기까지 무려 180여 년 동안 실록에서 사라졌다. 조선 초 거북선 역사를 정리해 달라.

A 조선 3대 왕인 태종 13년(1413년) 태종은 세자와 함께 임진도(임진나루) 근처에서 거북선과 왜선이 싸우는 것 (훈련)을 구경한데 이어 2년 뒤인 1415년 왜선을 격퇴할 수 있는 튼튼한 거북선 제작을 지시했다. 이후 1592년 이순신 장군이 만든 거북선이 실록에 다시 등장했다. 이처럼 거북선이 180여 년 동안 실록에서 사라졌는데 이는 왜구출몰과 관련이 있다. 고려 말부터 빈번했던 왜구 침입이 갈수록 줄어들면서 덩달아 거북선의 기록도 실록에서 사라졌다.

Q 임진강이 왜 거북선의 훈련장소가 됐나.

A 왜구의 침략회수를 보면 1360년대 28회, 1370년대 112회, 1380년대 122회, 1390년대 69회, 1400년대 50회, 1410년대 10회, 1420년대 18회에 이를 정도로 고려 말부터 조선 초까지 왜구 출몰이 극심했다. 그리고 임진강까지 올라온 적도 있어서 임진강과 한강의 합류지점에 거북선을 배치해 왜구의 한양 도성 침입을 사전에 막았을 것이다. 또한 임진강은 한양과 의주를 연결하는 교통요충지로서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지역이라 거북선이 배치되었을 수도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임진강에서 거북선이 훈련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Q 일각에서 임진강 거북선이 대마도(쓰시마) 정벌에도 나섰다는 견해도 있는데.

A 충분히 가능한 얘기다. 기록을 보면 세종 원년인 1419년 227척의 (1만7천 명) 병선으로 대마도를 공격했다. 이때 경기도에서 10척 등 전국의 큰 배들은 다 동원됐다. 태종은 1417년에 거북선을 튼튼하게 만들라고 지시했다. 거북선 건조는 약 1~2년 정도 소요됐다. 따라서 거북선 건조 지시 후 2년 뒤에 있게 되는 대마도 정벌에는 당연히 임진강에서 왜선과 실전 훈련을 통해 성능이 입증된 새로운 전선이었던 거북선이 투입돼 왜선을 제압했을 가능성이 크다.

Q 그럼 임진강 거북선이 갖는 역사적인 의미는 무언가.

A 이순신 장군이 창제한 거북선은 전투에 참가해 승전했지만 기록상 훈련만 받았던 임진강 거북선과는 크기와 구조 등이 상당히 다르다. 하지만 임진강 거북선의 아이디어는 이순신 장군 때까지 전승되어 창제됐다고 해도 무리는 아니다. 

즉 이순신 장군의 빛나는 전승에는 기록으로만 남아 있던 임진강 거북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화약 무기도 고려 말 최무선에 의해 만들어져 조선 세종 때 전승 되어 위력이 갈수록 강해졌던 것과 같은 이치다. 이런 점에서 조선최초 임진강 거북선은 거북선 역사에서 원조로서의 큰 의미를 보유하고 있다.

 

Q 15세기 초 등장한 임진강 거북선과 16세기 말 다시 등장한 이순신 장군 거북선의 크기 등을 비교해 본다면.

A 연구가 더 필요하지만 지금까지 연구결과 태종 때 임진강 거북선의 길이는 12~14m 정도의 2층 구조였다. 1555년 판옥선을 개발하기 전까지 조선의 전선은 모두 2층이었다. 1층은 물에 잠겼고 2층에서 노젓고 당시의 가장 큰 대포였던 천자포가 2개, 지자포가 3개가 앞뒤에 그리고 현자포가 좌우에 배치됐다. 80명 정도가 승선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반면 이순신 장군 거북선은 더 컸다. 선체 길이는 20여m의 3층 구조였다. 승선인원은 125명 정도(5명이 1조가 되어 노를 저었음). 1층은 수면, 2층은 노젓고 250~300㎏의 천자총통 2개가 전면에 배치됐고, 3층에는 대포만 설치됐는데 지자총통 2개 현자총통 3개, 황자총통 12개가 설치됐다. 거북선은 시간이 흐를수록 선박의 크기가 늘어났다.

 

Q 북한은 1994년 3월 국제방송을 통해 임진강이 조선 최초 거북선의 시험장소라고 발표한 적이 있다. 이에 북한 측 자료를 들여다보기 위해 남북공동 연구 필요성도 제기되고 있는데.

A 임진강 거북선을 제대로 복원하기 위해서는 이순신 거북선의 복원 및 시험이 제일 중요하다. 왜냐하면 관련 기록들이 적어서 실제로 시험을 통해 확인해야 하기 때문이다. 1795년에 발간된 ‘이충무공전서’에서 등장하는 거북선 크기(이순신 장군 거북선보다 8m 정도 더 큼) 등이 좋은 예다. 따라서 임진강 거북선 복원에 남북이 공동으로 참여하면 큰 의미가 있다. 북한에서는 전통 목선 만드는 기술이 아직도 남아 있을 수 있어 이를 남북교류 사업으로 활용하면 좋을 듯하다.

 

Q 임진강 거북선의 바람직한 활용 방안은.

A 우리나라에서 외국인들에게 관광거리가 되는 것은 거북선이 최고라고 생각한다. 거북선의 우수성은 외국에도 많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유럽에서는 바이킹 해적을 체험(먹는 것, 입는 것 등)하는 관광 상품이 인기다. 거북선도 교육 및 국제적인 관광 및 스포츠상품으로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우선 노와 함포가 갖추어진 거북선을 복원해 정기적으로 운항해야 한다. 당연히 전통 노를 젓는 체험도 해야 한다. 전통화약 무기 및 거북선이 전시된 박물관도 있어야 한다. 인천항 등으로 오는 크루즈 관광객 유치도 가능할 것으로 본다. 조선 최초 거북선이라는 역사적인 것을 가지고 엄청난 관광 사업이 가능하다.

 

Q 임진강 거북선과 관련해 당부하고픈 말은.

A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 설계도는 없다. 하지만 국민들은 다 안다. 거북선의 기능은 노를 저어 적선에 접근해 함포를 쏘아 적을 무력화시킨다. 이런 기능을 갖춘 진짜 거북선의 복원이 필요하다. 거북선에서 사용했던 전통화포에 대한 연구는 많이 진행되었다. 이제는 빨리 움직일 수 있는 노의 크기와 형태를 연구하고, 대형 포의 발사충격에 견딜 수 있는 튼튼한 거북선을 복원해서 함포도 발사해 봐야 한다. 아울러 파주시는 정부(문화재청)와 협의, 구체적인 연구 및 임진강 거북선 복원을 주도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파주=김요섭기자

사진-전형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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