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하는 인천] 애관극장, 정말 괜찮은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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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까지 우리들의 가장 큰 문화향유는 극장에서 관람하는 영화였다. 동인천 부근에만 총 19개의 극장이 있었지만, 시대의 흐름에 따라 하나 둘 사라지고, 필자의 기억 속에는 미림극장, 오성극장, 인천극장, 자유극장, 현대극장, 인형극장, 애관극장 등 많은 극장이 살아 있다.

 

그중에서 국산영화나 해외 영화가 개봉할 때 인천에서 가장 먼저 개봉하는 극장 중 하나가 애관극장이었다. 그만큼 인천에서 애관극장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았다.

 

일반적으로 한국 최초의 극장은 1902년에 세워진 협률사(協律社)로 알려져 있다. 협률사는 1902년 고종 재위 40주년 경축의식을 거행하고자 당시 한성부 야주현(漢城府 夜珠峴:현재의 광화문 새문안교회 자리)에 있었던 황실건물 봉상사(奉常寺)의 일부를 터서 마련된 2층 500석 규모의 상설극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 최초의 극장은 서울의 협률사(協律社)가 아니라 인천의 애관극장의 전신이었던 협률사(協律舍)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아마도 서울보다 인천에서 최초의 극장이 설립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지지 않은 것은 크게 두 가지로 보고 있다. 첫째 서울중심 사고체계, 둘째 인천사람들이 자신들의 역사에 대해 무관심했다는 것이다.

 

인천의 협률사(協律舍)가 한국 최초의 극장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인천 내리교회의 존스 목사가 1901년 ‘The Korean Review’ 1월호에 기고한 글에서 근거를 찾아볼 수 있다. 존스 목사는 ‘The Korean Review’에 기고한 ‘The New Century’라는 글에서 1900년 인천에는 3개의 영사관, 2개의 극장 등이 존재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즉, 1900년 이미 인천에는 2개의 극장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중 하나가 조선사람 정치국이 설립한 협률사였고, 다른 하나는 일본인 거주거리에 일본인들을 위한 인천좌(仁川座)를 말하고 있다.

 

정치국은 1895년 청일전쟁 때 지었던 창고를 개조해 협률사라는 이름으로 한국 최초의 극장을 개관했다. 협률사는 1912년 축항사(築港舍)라는 명칭으로 바뀌게 된다. 다시 1926년 애관(愛觀)으로 명칭이 바뀌게 되고, 영화와 공연, 강연 등으로 사용되어 오던 애관은 1950년대 이후부터 애관에다 극장을 붙이며 영화 상영 전용극장으로 오늘날까지 이어져 왔다.

 

이러한 애관극장이 매각될 처지에 놓여 있다. 그동안 자체적으로 운영해왔던 극장주 측이 더는 버티지 못하고 매각하겠다고 의사를 밝힌 듯하다. 만약 애관극장이 민간인에게 넘어가서 다른 용도로 사용된다면 인천사람으로서 마음 참담하기 그지없다. 100년 역사의 숨결이 각인되어 있던 애경사가 철거당해 주차장으로 변모했고, 인천지역 민주주의운동의 역사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가톨릭회관을 새롭게 신축하고자 철거되고 있다.

이렇게 우리 주변에 있던 근·현대 유산들이 경제논리에 의해 힘없이 사라지고 있는데, 이제는 애관극장도 누군가의 손에 매각될 처지에 놓여 있다. 많은 사람이 사라져 가는 근·현대 유산들을 살리기 위해 공공자원화 하자고 주장해도 허공에 흩어지는 외침으로 치부되고 있다. 이렇게 인천에 존재하던 근·현대 유산들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존재를 알리는 작은 현판 하나로 만족할 것인가. 정말 괜찮은 것인가.

 

곽경전 前 부평구문화재단 기획경영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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