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카페] 시간의 향기

박설희
박설희
이렇게 바빠도 되는 것일까. 시간이 없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토끼처럼 시계를 분침, 초침 단위로 나누어 “바쁘다 바빠” 종종거리며 끊임없이 무언가를 하고 있다. 손을 놓고 있으면 불안하다. 강의를 해야 하고 행사에 참석해야 하고 이러저러한 모임에도 나가야 한다. 그러다 보면 이름이 알려지고 존재감이 커지게 되기도 한다.

그런데 뿌듯함은 잠깐, 뭔가 자꾸 휘발되는 느낌이 든다. 시간을 쪼개면 쪼갤수록 시간은 점점 더 없어지고 “끝없는 현재의 사라짐”(한병철, <시간의 향기>)이 있을 뿐이다. 시간의 양은 극히 팽창되었는데 시간의 질을 상실한 것이다. 한병철 교수는 위의 책에서 활동적 삶 중심의 가치관을 사색적 삶 중심의 가치관으로 바꿔야 시간의 향기를 느낄 수 있다고 말한다.

숲 속의 빈터에 햇빛이 비치듯 한순간 드러나는 세계의 모습을 가만히 마주하고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하다. 미친 듯이 달려가는 시간을 멈춰 세우고 머무름의 기술을 배우는 것, 아름다운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것, 기다림의 감각을 복원하는 것. 시간을 양이 아니라 질적으로 확보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렇게 할 수 있는 최선의 처방은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여행은 반복되는 일상을 당장 멈추고 다른 시공간에 ‘나’를 밀어 넣는 것이다. 낯선 곳에서 나와는 다른 환경과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의 생활과 문화를 둘러보며 자신의 삶과 당면한 어려움을 다른 시각으로 돌아보게 된다. 그래서 세상에 대한 이해의 폭이 저절로 넓어진다. 나만의 특수한 삶이 아닌 인류의 보편적 삶에 대해 사색하게 된다. 여행은 ‘설렘’이고 ‘새로운 발견’이며 ‘충만함’이다.

단 한 번의 여행이 삶을 결정적으로 바꾼 예는 무수히 많다. 운명적인 여행의 한 예로 연암 박지원의 열하행을 들 수 있다. 그건 우발적 여행이 아니었다. 신문물을 접하고자 하는 열망뿐 아니라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평생을 벼르고 별러 준비해온 여행이었다. 조선 사행으로서는 최초로 열하에 가게 된 연암은 약 5개월여에 걸친 중국기행을 마치고 짐보따리보다 덩치가 더 큰 메모 뭉치를 들고 돌아와 3년여 만에 <열하일기>를 완성했다. <열하일기>는 길 위에서 얻은 결과물이다. 만약 연암이 길 위에 나서지 않았다면 <호질>을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고 <허생전>을 구술하지 못했을 것이다. <호곡장(好哭場)>이나 코끼리를 통해 우주의 비의를 본 <상기(象記)> 등도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이 같은 호기심, 끊임없이 던지는 질문, 새로운 문물에 대한 관찰과 사색, 초대받지 않은 자로서 역할과 책임에서 벗어난 자유로움, 솔직함을 바탕으로 한 풍자와 해학 등 그는 여행자의 미덕을 골고루 갖추었다.

여행은 홀로 떠나야 제맛이다. 무리를 지어 몰려다니다 보면 사색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다. 그야말로 주마간산, 풍광만 훑는 관광이 되기 쉽다. 만약 가까운 시일 내에 여행을 할 수 있는 여건이 내게 주어진다면? 단연 사막으로 가 볼 생각이다. 주먹만한 별들이 쏟아질 듯 반짝이는 그곳에서 어린왕자와 사막여우도 만나보고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아도 피어나는 꽃과 풀을 지켜볼 것이다. 숨을 곳도 숨길 곳도 없는 사막에서 온전히 풍화되고 있는 무한의 시간을 느껴보고 싶다.

10월2일이 임시공휴일이 되면서 추석 연휴가 열흘이 되었다. 그 연휴를 다 누릴 수 없는 사람들도 많겠지만 국내로 해외로 긴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올가을에는 운명의 장소로 여행을 해 보자. 시간의 향기를 느껴보자. 그도 저도 여의치 않다면 제자리에서 하는 여행이라도 해보자. 독서 말이다.

 

박설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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