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가∙심사위원이 좋아하는 작품보다
독자 사랑받는 작품이 오랜 세월 이어져
우려먹을게 없다 보니 평론가들에게서 환영은커녕 외면만 당한다는 것. 문학상 또한 누구나 이해하기 쉬운 작품에 주게 되면 상의 권위가 떨어질 게 아니냐는 것. 그렇지만 자기 작품은 독자들이 좋아하기 때문에 한편으론 행복하다는 것이었다.
이 N시인의 하소연은 비단 그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라고 본다. N시인과 같이 대체로 짧고도 쉬운 시를 쓰는 작가들은 한두 번쯤 이 문제에 대해 나름대로 생각을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해 평론가란 사람들은 남의 작품으로 먹고산다.
그러다 보니 자연 우려먹을 게 많은 작품을 찾게 마련이다. 아무나 읽어도 쉬이 이해가 가는 작품을 가지고 뭘 이야기할 것인가. 그러다 보니 난해하다싶은 작품에 눈이 갈 게 뻔하다. 문학상도 마찬가지다. 짧은 시보다는 길이가 있는 시, 쉬운 시보다는 난해하다 싶은 쪽의 시에 상이 주어지는 게 보통이다.
신춘문예 역시도 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오죽하면 ‘신춘문예형 시’란 말이 나왔겠는가. 그러다 보니 아예 이를 염두에 두고 시작(詩作)을 가르치는 곳도 있다는 얘기가 들린다.
근간에 와서는 다행히도 이에서 벗어난 작품들이 당선되는 예가 늘고는 있으나 아직도 일부에서는 그 틀을 보여주는 작품들이 계보를 잇는 듯이 보인다.
그런데 정작 독자들의 손에서 손으로 이어지고 있는 작품들은 평론가들이나 문학상 심사위원들의 안중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나 이형기의 <낙화>, 김소월의<진달래 꽃>, 박인환의 <세월이 가면>, 김춘수의 <꽃>, 김광섭의 <저녁에>같은 작품들이 그 좋은 예라 하겠다. 어디 시뿐인가. 동화에도 그런 작품이 여럿 있다. 권정생의 <강아지 똥>, 황선미의 <마당을 나온 암탉>, 원유순의 <까막눈 삼디기> 등등.
반면에 소위 문학상을 탔다는 작품들의 현주소는 거의가 주소불명인 작품이 허다하다. 잠시 ‘반짝!’하고 난 뒤엔 어떻게 됐는지 행방조차도 묘연한 것들이 태반이다. 특히 시 분야의 작품들이 그러하다. 몇몇 평론가들과 심사위원들만이 좋아하는 작품들은 독자와의 눈높이가 맞지 않을 뿐 아니라 세월과 함께 쉬이 잊혀간다.
필자는 이를 요즘 말하는 ‘갑질’의 한 형태로 보고 싶다. 몇몇 사람들이 쥐고 흔드는 어쭙잖은 권력쯤으로 보고 싶은 것이다. 따라서 소위 ‘문제작’이니 ‘수상작’이니 하는 작품들에 별로 호감이 가지 않는다. ‘문학성’이 어떻고 ‘새 지평을 여는…’ 운운도 좋지만 그보다는 독자들의 손에서 손으로, 입에서 입으로 옮겨지는 작품에 더 마음이 간다.
Y작가는 한 독자와의 만남 자리에서 어떤 작가로 남고 싶으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자기는 유리관 안에 진열된 트로피로 남기보다는 아이들의 발에서 짓뭉개지고 사랑받는 ‘축구공’으로 남고 싶다고. 그 얘기를 들은 난 기쁜 마음으로 박수를 쳤던 기억이 난다.
윤수천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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