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카페] 신발

▲
첫 출근을 하는 딸의 뒷모습을 본다. 새 구두, 새 바지, 새 셔츠…. 어떤 길도 걸어본 적 없는 저 구두를 신고 아이는 아스팔트와 보도블록과 흙길을 걸으며 때로 발뒤꿈치가 까지고 발톱에 피멍이 들고 발바닥이 화끈거리기도 할 것이다. 가기 싫은 길, 가야 할 길, 가고 싶은 길 사이에서 포기할 것과 선택할 것을 가릴 테고 그 길 위에서 누군가를 만나서 제 분신을 데리고 또 다른 길을 걷고 있을 것이다.

 

늦지 않으려 부리나케 현관문을 닫는 소리를 들으며 돌아서는데 문득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때묻은 운동화를 손으로 빨면서 ‘이 신발을 신고 아이가 길을 잃지 말고 학교를 제대로 찾아갔으면, 학교에서 올 때에도 헤매지 말고 집을 제대로 찾아왔으면’ 하는 생각을 수없이 한다고 했다.

 

지적장애아를 둔 어머니였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 있는, 하루 중 유일한 자기만의 시간에 복지관에서 진행하는 문학 강좌에 나온 것이다. 매시간 그들의 고통이 고스란히 전해져 함께 많이 울었다.

 

아이의 운동화를 빨며 그렇게 간절한 마음이 돼 본 적이 있었던가. 내게는 너무도 당연한 일이 누군가에게는 기적이었던 것이다.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면 무엇을 하겠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다.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평소 해보지 못했던 것을 해보겠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지내겠다 등의 대답을 기대했던 것인데 한 어머니가 “춤을 덩실덩실 추겠다”고 했다. 

그 이유를 묻자 자신이 먼저 죽으면 저 아이를 누가 돌보나 늘 걱정인데 같이 죽을 테니 그런 축복이 어디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 한 마디에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는 고통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그 이후 나는 평범한 내 아이가 잘 자라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웠고, 비뚤어지지 않고 커가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행복이란 게 별것 아니었다.

 

신발 생각을 하다 보니 또 하나 떠오르는 신발이 있다. 아버지에게 처음으로 사드린 가죽 구두.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내가 큰 마음 먹고 사드린 유명 메이커 제품이었다. 아버지는 그걸 아끼느라고 친척들 결혼식에나 신었기에 거의 새것과 다름없었다.

 

집에서 돌아가신 아버지의 상을 그대로 집에서 치렀는데 4월 초 늦은 봄눈이 내려 계단참에 내놓았던 까만 구두에 밤새 눈이 소복이 쌓였다. 구두코에 내려앉은 눈은 바람에 다 날아가 버리고 발이 들어가는 움푹한 부분에만 하얗게 눈이 남아 있었다. 55세에 질병으로 돌아가신 아버지 대신 흰 눈이 그 구두를 신고 있는 거였다. 순결한 발. 어떤 고통이나 괴로움이 없을 발.

 

새 구두라는 게, 발가락도 좀 까지고 발뒤꿈치도 까지고 하면서 발과 구두가 서로 가장 편한 형태로 변형되면서 형태가 완성된다. 이리저리 부대끼다 어느 시점에 이르러 편해지는 그 과정이 세상살이와 많이 닮았다.

몇십 개의 구두를 갈아 신을 즈음엔 은퇴할 나이가 되고 그 구두를 신고 공원 벤치에 앉아 주변의 꽃이나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기도 한다. 그리고 움직이는 시간보다 움직이지 않는 시간이 점점 더 많아진다. 마치 식물인 것처럼. 그래서 나는 노인들의 신발이 화분 같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지난 5월 문재인 대통령이 현충원을 참배할 때 신었던 낡은 구두가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장애인 사회적 기업에서 만들었다는, 밑창이 닳은 구두. 고통받는 자들, 사회적 약자들과 동행하고자 하는 그의 의지가 잘 드러나 있었다. 뚜벅뚜벅 흔들림 없이 강건한 걸음이기를 기대해본다.

 

박설희 시인

© 경기일보(www.kyeonggi.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댓글 댓글 운영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