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만약 밥 딜런이 한국 땅에서 살았다면 과연 그런 호사(?)를 누릴 수 있었을까 싶다. 모르면 몰라도 우선 한국문단에서 제대로 평가를 받지도 못했을 뿐더러 노벨문학상 근처에도 가지 못했을 게 틀림없다. 자기 나라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작가를 누가 노벨문학상이라는 영예의 자리에까지 모셔갈 것인가.
한국문단은 자기 장르 울타리가 생각 외로 엄격한 문단이다. 시인이 소설을 쓰거나 소설가가 시를 쓰면 자기 영역에 들어온 침입자쯤으로 바라보는 게 현실이다. 특히 아동문학가가 시를 쓰거나 소설을 썼다하면 이건 아예 무시를 당하기 딱 십상인 게 한국문단의 현실이다. 그런데 묘한 것은 시인이나 소설가가 동시나 동화를 썼다 하면 오히려 대서특필하여 광고까지 해준다.
장르에 대한 편견이 심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는 또 있다. 지난번 정부가 발표한 문학진흥법에도 이런 편견은 너무도 잘 드러나 있었다. 문학용어에 시·소설·수필·평론은 들어 있었으나 아동문학과 시조는 아예 언급조차 없었다. 시조는 그래도 시에 포함된다고 볼 수 있으나 아동문학이란 장르는 엄연히 성인문학과는 구별되는 장르 아닌가. 별도의 장르로 인정해줘야 마땅하다.
외국에서는 시인이 소설을 쓰거나 어린이를 위한 동화를 써도 이상하게 보지 않는다. 동화작가가 소설을 쓰거나 희곡을 써도 누가 뭐라 하지 않는다. 발표한 작품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뿐 장르의 넘나듦에는 관대하다. 그들의 약력에 시인, 소설가, 희곡작가, 동화작가 등이 범벅돼 있는 게 그 좋은 예이다.
자기 영역에 대한 애착은 물론 있어야 하고 이를 지키기 위한 노력도 필요하다. 그러나 울타리를 높게 쳐놓고 아예 넘보지도 못하게 하는 것은 한국문학의 발전에 장애가 될지언정 도움이 되진 않는다.
톨스토이도 말년에는 어린이를 위한 동화를 썼다.「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바보 이반」같은 작품은 우리나라에까지도 알려진 명작이다. 그런가 하면 전 세계 어린이뿐 아니라 어른들에까지도 환영받는「아낌없이 주는 나무」를 쓴 미국의 셸 실버스타인은 극작가에, 시인에, 일러스트라이터에, 음악가로 활동을 했다. 그럼에도 누구 하나 그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차제에 평소 안타깝게 생각해 온 작가가 있다. 일찍이「성황당」이란 작품으로 조선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소설가로 등단해 일생을 소설 쓰는 일로 살다 간 정비석이 바로 그 작가다. 그는 뛰어난 문장가로 수많은 작품을 썼음에도 「자유부인」같은 대중소설을 썼다는 이유로 한국문학에서 제외되고 있음은 퍽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다른 것은 몰라도 그의 「산정무한」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명문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금강산을 가보지 않은 사람일지라도 그의 글을 읽는다면 반은 간 거나 진배없다고 본다. 순수문학과 대중문학과의 경계도 엄격한 규제보다는 상호 교류를 통해 공동발전을 꾀하는 쪽으로 전환의 모색이 필요하다.
윤수천 동화작가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