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실버 문학 시간에 앨빈 토플러의 <미래의 충격>과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중 어느 분이 자신의 경험담을 이야기했다.
“손자랑 카톡을 주고받던 중에 손자가 무엇을 하라고 이야기했는데 내가 못 하겠다고 했더니 ‘할머니 그것도 못 해?’ 하면서 무시를 하더라고요. 이제 겨우 여덟 살 난 아이한테 무시당했다 생각하니 기가 막혔어요.”
요즘 아이들은 걷기 전부터 엄마 아빠의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면서 자라난다. 이들에게 휴대폰과 같은 기기는 무척 자연스러운 생활의 일부분이다. 그에 비해 노년 세대는 그러한 기기에 익숙해지는 데 시간이 걸릴 뿐 아니라 그 많은 기능을 다 활용할 수도 없다. 불과 이십 년 전만 해도 퍼스널 컴퓨터를 가진 개인들이 그리 많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정보화 사회의 발전 속도는 가히 경악할 만하다.
예전에는 노래방에서 부르는 노래를 들으면서 세대 차이를 실감했는데 이제는 전자기기나 인터넷, 인공지능 등의 활용 면에서 세대 차이가 가장 많이 나는 것 같다. 몇 세대에 걸쳐 이루어지던 변화들이 지금은 불과 한 세대만에 이루어지고 있다. 변화에 점점 가속이 붙고 있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를 처음 읽었을 때의 놀라움을 기억한다. 아이들을 공장에서 대량생산하고 생물학적 부모가 따로 없으며 사회에서의 계급적 역할에 따라 태아 때부터 영양분이나 산소 공급 등 성장환경이 조절되며 우울해지면 ‘소마’라고 하는 알약을 삼키면 되는 사회….
1932년에 출간된 이 소설은 유토피아라고 믿는 사회가 사실은 디스토피아임을 일깨워준다. 그로부터 85년이 흐른 지금, 우리는 종교나 윤리 등에 어긋난다는 이유 때문에 그러한 일을 하지 않을 뿐 기술적으로는 소설 속 내용이 얼마든지 가능한 시대에 살고 있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이전에는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이라는 소설이 있었다. 1818년 출간된, 공상과학소설의 원조이자 고전격인 이 소설에는 과학자 빅터 프랑켄슈타인이 등장한다. 부제가 ‘현대의 프로메테우스’인 이 소설은 새로운 과학적 발견이나 무모한 과학적 실험이 불러올지도 모르는 끔찍한 재앙을 경고하고 있다. 과학자 프랑켄슈타인은 생명 원리를 발견하려는 욕망에만 빠져 있을 뿐 자신의 작업에 대한 책임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자신이 창조한 피조물의 외모가 끔찍하다는 이유로 학대 방치해서 그 피조물을 복수심에 불타는 괴물로 만들었다.
생명과학과 생명 복제 기술이 사회적 합의나 정서를 훨씬 앞질러 가는 오늘날, 메리 셸리조차도 이백년 후에 인간의 과학이 이 정도로 발달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생명의 원리를 찾아내겠다는 의지로 피조물을 창조해내기까지 이르렀으나 자신의 피조물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는 태도에서, 원자폭탄의 이론적 바탕이 되기는 했으나 그것이 인류를 대량살상하는 데 쓰일 줄 몰랐다는 아인슈타인의 변명을 떠올리게 된다.
동물 복제가 가능하다면 당연히 인간복제도 가능하다. 최근에는 인공적인 합성 세포를 만드는 기술까지 나왔다고 한다. 쥐의 머리를 다른 쥐의 몸에 이식하는 데 성공했다는 기사를 본 적도 있다. 이만큼 기술은 빠른 속도로 발달하고 우리는 불과 수십 년 앞을 내다보기도 힘들게 되었다.
과학자들 대부분은 프랑켄슈타인처럼 인류를 위한다는 대의와 희망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가 어떤 영향을 불러올지 아무도 알 수 없다. 과학은 어디로 향하는가. 지구호에 탄 우리가 가는 방향은 어디인가. 과학자들은 알고 있는 걸까.
박설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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