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종교] 그래, 그것이 국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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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국가인가?” 세월호 참사 이래 대한민국의 국가성에 대한 물음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정부’에는 반대하더라도 ‘국가’에 대해서만큼은 무한대의 믿음을 지켜왔던 이 나라 사람들이 “과연 이 땅에 국가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 따지기 시작했고, ‘박근혜-최순실 비리 사건’에 이르러는 이건 도무지 “나라도 아니다”고 최종 진단한다. 그리고 바로 그 나라를 바로잡아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고 ‘국가다움’을 실현하기 위해 광장으로 모여들고 투표장으로 달려갔다.

 

“이것이 국가인가?”라는 질문과 비판에는 국가다움에 대한 기대와 요구가 담겨 있다. 뭇사람의 생명을 지키고 정의와 평화를 이루는 국가, 개인의 권리를 보장하고 복지를 실현하는 그런 국가 말이다. 국가는 그러려고 있는 것이라고, 그것이 국가의 본질이라고들 말한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곰곰이 헤아려 보건대, 나라답지 못하다던 그 모습이야말로 외려 역사에 늘 있어왔던 그 ‘국가’ 아니던가.

 

그래, 그것이 국가다! 국가는 처음부터 그러했다. 국가는 본디 불의하다. 폭력을 행사하고 지배를 관철하는 데는 유능하지만, 생명을 사랑하고 살리는 데는 한없이 무능하다. 지배 권력에 대해서는 무한 책임을 지지만 피지배 대중에게는 철저히 무책임하다. 국가는 한 번도 권력을 공공의 손에 넘긴 적이 없다. 권력은 늘 소수 힘 있는 사람들의 몫이었다. 그런 점에서 이제껏 대한민국이야말로 참으로 국가다운 국가 아니던가!

 

성서가, 기독교 신앙이 말하는 국가 또한 그러하다. 성서는 곳곳에서 국가를 인간 타락의 산물로 묘사한다. 구약성서는 이스라엘 역사를 ‘출애굽’의 해방 경험에서 시작하였고 이스라엘 국가 체제의 출현을 하느님에 대한 배반으로 규정하였으며, 예언자들은 바로 그 국가 체제에 대한 심판을 선포하였다. 신약성서, 특히 요한계시록에서 국가는 자신의 권세와 번영만을 탐닉하는 ‘짐승’으로, 하느님의 으뜸가는 원수로 묘사된다.

 

예수의 눈에 비친 국가의 실상 또한 “집권자들이 제멋대로 주인 노릇을 하고, 고관들이 횡포를 부리는” 사악한 ‘칼’의 체제일 뿐이었다. 성서를 통틀어 국가는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악의 집적물일 뿐 그 어떤 신성도 지니지 않는다. 국가는 창조 질서도, 구원 질서도 아니다. 그저 인간 타락의 산물인 폭력, 그 폭력에 기대어 지배를 관철하는 정치 체계요, 사람이 만든 제도일 뿐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은 국가를 신성시하거나 절대시 하는 것을 엄격히 금지한다.

 

오늘 많은 사람이 희망하는 그 ‘국가다움’을 이루기 위해서라도 되레 국가의 ‘마성’(魔性), 국가의 ‘민낯’을 직시해야 하지 않을까. 정의를 추구하는 국가, 구성원들의 권리를 보장하는 국가는 우리 시대가 설정한 ‘당위’일 뿐 결코 ‘사실’이 아니기에 국가를 낙관하기보다는 의심하고, 추종하기보다는 견제하는 마음가짐, 맡겨 놓기보다는 스스로 나서는 태도가 필요하지 않을까.

사람이 만든 제도니 사람이 뜯어고치되 사랑·평화·정의와 같은 더 높은 가치, 기독교 투로 이야기하자면 ‘하느님의 뜻’에 기대어 국가의 마성을 통제하고 길들이려는 노력 말이다. 더이상 당하지 않으려면, “이것이 국가인가?” 아우성치는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말이다.

 

박규환 숭실대 초빙교수·기독교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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