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의 초대 교회는 본토박이 유대인과 해외파 유대인들로 구성되었는데, 과부를 원조하는 사업에서 본토박이 과부를 우대하고 해외파 과부를 홀대하는 일이 벌어졌고, 이에 해외파 교인들이 들고 일어난 것이다.
교회를 이끌던 사도(使徒)들이 모두 본토박이인 만큼 이 사건은 사도들의 지도력에 대한 문제 제기이기도 하였다. 이리하여 예루살렘의 초대 교회는 본토박이 교인과 해외파 교인이 서로 다투는 국면으로 접어든다. 앞서 사도행전 2장이 전하고 있는 아름다운 초대 교회, 이상적인 교회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예수를 지척에서 모셨던 사도들이 버젓이 버티고 있는데도 예루살렘의 초대 교회가 분쟁에 휩싸였다는 사실은, 자칫 이상화하기 쉬운 초대 교회가 실상에서는 불완전한 인간들의 불완전한 모임이었음을 알려 준다. 초대 교회라고 해서 결함도 과오도 없고, 따라서 참회도 회개도 필요 없는 ‘그런’ 교회가 아니었다는 말이다.
예루살렘 교회 또한 자기를 두둔하거나 이상화하지 않았다. 문제 있는 현실을 두고 이러저런 변명으로 대충 얼버무리며 감추려 들지 않았고, 좋은 교회라는 이미지가 깨지더라도 들추어내고 고쳐갔다. 공동체 회의를 열어 토론을 벌였으며, 사도들은 책임을 통감하고 행정 일선에서 물러났고, 공동체는 원조 사업을 맡을 새로운 일꾼을 뽑는다.
아무 오류나 죄악도 없는 완벽한 교회, ‘그런’ 교회는 없었다. 초대 교회 역시 여기저기 얼룩이 묻어 있는 교회일진대, 그런데도 그 초대 교회를 바라보는 것은 그곳에는 회개와 쇄신의 ‘교회다움’이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도 어떤 질서도 어떤 의견도 절대시하지 않되, 어떤 사람, 어떤 구조, 어떤 의견에도 열려 있는 겸손함, 하느님께서 반드시 일치를 이루어 주시리라는 믿음이 있는 까닭이다. 회개보다는 변명을, 쇄신보다는 안주를 좋아하는 우리네 성품을 볼진대 비틀거리면서도 회개하고 힘겹지만 쇄신하며 거룩함을 추구했던 그들의 신앙과 삶이야말로 본보기가 아닐 수 없다.
어디 교회뿐일까. ‘그런’ 종교, ‘그런’ 정치 또한 없다. 그것이 인간 삶의 현실일진데 그 ‘없음’을 탓할 까닭이야 있을까. 얼룩을 드러내고 책임지고 쇄신하려는 자세가 없으니 참담할 뿐이지. 개신교회, 개혁교회를 자임했던 교회들이 ‘교회’라고 이름 붙이기 조차 민망할 정도로 타락해버린 현실에 대하여 내로라하는 종교인 가운데 누구 하나 책임지고 물러나는 사람이 없고, 민의와 헌정을 짓밟아 놓고서도 외려 똘똘 뭉쳐 되술래잡기에 바쁜 부라퀴들만 넘치니 말이다.
문제없다는 자만도 문제지만, 문제 있다는 말만 되풀이하면서 문제를 들추어내고 고치려 하지 않는다면 그 또한 자폐의 늪에 빠진 종교요 정치일 테니, 아무쪼록 이 자만과 자폐를 경계하면서 쉼 없이 회개하고 쇄신해야겠다. 나부터, 우리부터.
박규환 숭실대학교 외래교수·기독교학 박사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