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카페] 현실에 적합한 단어가 부족하다

글이 눈에 잘 안 들어온다. 시 한 줄, 소설 한 문장 읽기보다 계속 쏟아져 나오는 새로운 소식을 한번 더 검색하게 된다. 나만 그럴 것 같진 않다. 전국에서 수백만 명이 현직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거대한 역사의 한 장이 펼쳐지고 있는데 이보다 더 현장감 있고 생생하고 감각적인 언어가 있을 수가 없다.

 

충격과 경악으로 마비되었다가 분노로 들끓다가 이제 새로운 시간의 도래를 염원하는 물결로 굽이굽이 강을 이룬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상상력이 늘 현실을 못 따라간다는 뼈아픈 자성을 해본다. 문학인들에게 현실만한 스승이 있을까.

 

『백년 동안의 고독』으로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콜롬비아 작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문학과 현실에 관하여」라는 글에서 “현실에 적합한 단어가 부족하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현실이 우리보다 더 나은 작가라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며 작가들은 “겸손하게 그런 현실을 모방하려고 노력해야 하며 그런 것이 가능할 때 비로소 최고의 작가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단언한다. 마르케스의 작품을 마술적 사실주의 또는 환상적 리얼리즘이라고 사람들은 말하지만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중남미의 현실에 알맞은 언어를 찾으려고 애쓸 뿐인 것이다.

 

그의 글을 들여다보며 나는 아카데미즘에 빠진 한국 시단을 생각해보게 된다. 최고의 학력을 가진 이들이 쓰는 시는 얼마나 난해하고 이론적인지, 그리고 그들에 의해 교육을 받은 창작전문가들의 시는 또 얼마나 고차원적이어서 영문 모르겠는지…. 심지어 시를 난해하게 쓰라고 강의라는 명목으로 선동하는 시인도 있다고 들었다.

유명출판사에서 첫 시집과 첫 작품집을 내고서는 마치 대가가 된 양, 전국 단위의 무슨 심사, 무슨 행사에 중요인물로 초청되어 특강을 하고 세미나에 심포지엄에 불려 다니면서 의견을 발표하고, 그리고는 미래의 작가들에게 글 잘 쓰는 우상이 되어 문단 권력인 양 행세하면서 성추문이나 일으키는 풋내기 시인 작가들도 있다. 젊은 시인들에게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참신함, 개성, 활력이지 설익은 글 솜씨를 빌미로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세속인은 아닌 것이다.

 

그들만을 탓할 일도 아니다. 그들이 그렇게 전횡을 하도록 시인하고 묵인한 것이 누구였는가를 생각해본다. 그들에게 선망의 시선을 보내며 우상화에 한몫 거든 것이 내가 아니었나를.

 

시는 자유며 혁명이며 사랑이라고 했던 시인 김수영의 말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시인이야말로 ‘자유’로운 영혼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기성 권력이 하는 행태 그대로, 자신의 자유를 위해 타인의 자유를 짓밟고 가진 자의 만행을 부리고 있다면 어떻게 시인이라고 할 수 있는가.

 

시인은 자신이 살고 있는 현실에 적합한 언어를 찾으려고 애써야 한다. 그런데 현실에 적합한 언어는 저절로 얻어지는 게 아니다. 이와 관련해서 허수경 시인은 「시인이라는 고아」라는 글에서 현실이 몸을 관통하는 순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균열을 감지할 때 온전히 경험해야 한다. 이것은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이다. 몸을 정확하게 통과하지 않는 범상한 시들을 나 역시 많이 쓰고 살았다. 내가 쓴 범상한 시들은 나를 괴롭힌다. 아무리 퇴고를 하고 또 해도 그 범상함은 숨겨지지 않는다.”

 

몸으로 온전히 경험한다는 것. 균열이 몸을 정확하게 통과한다는 것. 지금 이 시간에 시인들이 해야 할 일은 이것이다. 현실의 육화. 광장에서, 사람들의 얼굴에서, 촛불에서, 균열을 감지하고 온전히 경험하는 것. 그리고 현실에 적합한 언어를 찾으려고 애써야 한다. 온몸으로 밀고 나가야 한다.

 

박설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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