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된 격식이나 예법에 얽매여 막상 진리를 놓치기가 십상이고, 좁아터진 교리로 세상을 재단하거나 딱딱한 계율로 사람을 묶기 또한 예사다. 위아래를 나누는 데도 익숙하고 물질에도 약삭빠르다. 게다가 정치권력과 짝하여 위세 부리기까지 좋아하니, 이쯤 되면 가히 권력종교요 종교권력이라고 할 만하다.
그때 그네들도 그랬다. 성전과 율법으로 뭇사람을 꽁꽁 묶어두고 로마 제국의 식민 질서를 떠받치는 데만 골몰하던 1세기의 ‘예루살렘’ 말이다. 체제의 중심이자 율법의 본산인 예루살렘에 가난한 이들, 병든 이들, 갇힌 이들과 같은 변두리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갈릴리 예수’의 자리가 있을 리 만무하다. 아니나 다를까. 예루살렘의 귀족들은 예수를 죽이기로 작정하고, 끝내 죽인다. 예수야말로 바로 그 예루살렘의 영광, 예루살렘의 번영과 성장을 무너뜨리는 파괴자이고 불순분자인 탓이다.
예루살렘의 영광은 하느님의 성전(聖殿)을 독점한 데 따른 것이며, 예루살렘의 번영은 갈릴리 농촌에 대한 가혹한 수탈로 유지되고, 예루살렘의 성장은 세계를 지배하는 로마 제국의 가치와 논리를 수용함으로써 가능한 것이기에 “그늘진 죽음의 땅”이라고 불리던 갈릴리의 무지렁이들을 예루살렘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었으리라. 하느님은 오직 그네들의 하느님이지, 만인의 하느님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음모와 부조리가 가득한 그곳으로 자꾸 사람들이 모여든다. 예루살렘을 거룩한 곳으로 여기고, 성전이 자기들을 성결케 해주리라고 믿었던 까닭에 돈과 시간과 노력을 들여 꾸역꾸역 모여든다.
이 맹목스런 믿음이 예루살렘을 지탱하는 버팀돌이 되었을 테다. 이 헛된 믿음과 무지에서 벗어나지 않고서는, 거룩함으로 포장된 예루살렘의 추악한 실상을 드러내지 않고서는 ‘하느님 나라’가 까마득하기에 예수는 죽음을 무릅쓰고 예루살렘에 올랐고, 예루살렘은 그 예수를 죽임으로써 반인간성과 가학의 본성을 드러내고 말았다.
오늘도 ‘예루살렘’은 곳곳에 건재하다. 정치권력과 경제권력, 지식권력과 종교권력이 손 맞잡고 자기네 성채를 굳건히 쌓고 있다. 많은 사람이 의심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면서도 ‘예루살렘’을 신성시하는 이념의 포로가 되어 그 질서를 내면에 새기고 있다.
언제까지 현존 질서를 떠받들고 공글리는 가치와 규범들에 매여 있을 것인가? 언제까지 그네들 옆에서 알랑대며 용춤이나 추고 있을 것인가? 하여, 예수는 예루살렘의 허상에서 벗어나라고, 그 질서에 맞서기 위해 함께 예루살렘에 오르자고 우리를 초대한다. 돈이나 권력이 아니라 사랑으로, 갇힌 성전이 아니라 열린 거리와 광장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이야기하자고 말이다.
박규환 숭실대학교 외래교수·기독교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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