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구나 우리의 주거생활의 가장 보편적인 형태인 아파트숲 속에서 우리는 죽어서도 비탈에 만들어진 아파트형 무덤에 가든지 아니면 연기가 되어서 사라지는 것을 생각하면 허전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리고 우리의 기억들을 되살릴 수 있는 것들은 이제 우리의 옆에 두는 것이 이 문명사회에 하나의 사치로 생각하는 세태가 밉기도 하다.
오래 전에 남태평양을 여행하면서 집 마당에 부모님의 묘소를 만들어서 꽃밭으로 꾸미어서 아침과 저녁으로 가꾸는 것을 보았다. 아침에 일어나서 방문을 열면 바로 부모님의 묘위에 핀 열대의 꽃들이 보면서 어릴 적의 추억들을 되새기고 있었다. 우리도 과거에는 이와 비슷하게 살았다. 대체로 마을의 뒷동산에 부모님들이 누워계신 것이 보통이었고 대를 이어서 무덤이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다.
전통사회에서는 삶과 죽음이 같은 공간에서 일어나게 되고 조상과 자손 간에 오랜 시간 속에 만들어진 기억에 대해서 무언의 교감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죽음의 문화는 사실 이제까지의 인류 문화유산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이었다. 피라미드나 고구려고분 그리고 조선왕릉 등 아마도 수도 없는 과거의 문화유산이 죽음과 관련된 것이다. 그리고 신전 역시 죽음을 극복하기 위한 신앙적인 장소라고 할 수 있다.
이제는 죽음과 관련된 의례문화는 거의 사라지고 없다. 그나마도 진도의 씻김 굿과 같은 것은 무대에서나 볼 일이다. 어느 곳이든 정책적으로 화장을 장려해 묘를 덜 써서 경작지와 숲을 보존하려고 하고, 자손들도 장례는 경제적으로나 시간적으로 대단히 부담스러워하는 것이 세상의 풍조이다. 우리의 생활에서 장례문화가 사라진다고 해도 우리 사회에 문제가 없을 것인가?
인간의 기억은 인간의 삶의 양식이다. 강남 역이나 다른 테러의 현장에서 자연적으로 이루어지는 애도의 의식들에서 보듯이 인간이 절망할 때에 기억은 치유의 약이 되기도 하고 또한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의지를 단단하게 만드는 역할도 하고 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소중한 기억들을 쉽게 지워버리는 것인가? 과거에 우리가 사회적 효율성을 우선하는 시기에 시작된 풍습이 별 생각 없이 지속되어 우리의 장례문화를 사라지게 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기억은 지속되기 위해서 우리 주변에 그 자극제가 필요하다. 우리의 정신 건강을 위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아파트 숲 속에 우리 부모님들의 무덤이 있는 공원을 만들어 아파트를 우리 마음의 고향으로 만들 수는 없을까? 우리의 사표가 되는 사람들의 무덤이 있는 아름다운 도시공원이 있을 수는 없을까?
어느 생물이건 죽음은 바로 삶의 원천이 된다. 모든 생물의 육체는 소속됐던 자연으로 돌아가서 살아 있는 사람들을 위한 에너지가 된다. 죽은 자의 삶에 대한 풍요로운 기억들이 살아 있는 자의 정신이 성장하고 유지하는데 양식이 되지 않을까? 또 하나의 엉뚱한 생각인가?
배기동 국제박물관협회 한국위원장·한양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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