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의 주인공 오스카는 자신의 세 번째 생일날 의도적으로 계단에서 떨어지는 사고를 당한 뒤로 오랜 세월을 더 이상의 성장이 멈춰버린 난장이로 살아가게 된다.
왜곡되고 비틀린 어른들의 세계와의 ‘거리두기’였다. 이후로 ‘냉철한 관찰자’로서 현실을 지독하게 비꼬아대는 악마적 수다쟁이로 살아간다. 오스카가 두드리는 양철북 소리와 끔찍한 괴성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부조리한 어른들의 세상을 공격하고 그 소리의 힘이 세상을 멈추게도 한다. 어른들이 모두 죽고 전쟁이 끝나고 나서야 자라지 못하고 멈춰 있던 오스카의 몸이 커지면서 스물 한 살의 청년으로 돌아온다.
귄터 그라스는 나치즘이 광란하던 독일의 상황과 소시민적 일상의 충돌을, 작은 키 때문에 어른의 세계에도 속하지 못하고 성인의 지성을 가져 아이의 세계에도 속하지 못하는 비정상적인 존재의 눈으로 포착하며 전시 및 전후시대 독일의 현실을 희화적으로 묘사했다. 그런데 독일의 전후시대 상황과 오늘의 대한민국이 묘하게도 겹쳐진다.
서울연구원이 지난 10일 발간한 ‘한 눈에 보는 서울’ 보고서에 따르면, 서울의 청장년 10명 중 5~6명이 결혼을 하지 않고 부모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는 ‘캥거루족’ 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애·결혼·출산이라는 전통적인 가족 구성에 필요한 세 가지를 포기한 세대를 지칭하는 소위 ‘삼포세대’의 실상을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이다. 학자금 대출 부담, 치솟는 집값 등 과도한 삶의 비용을 감당할 수 없다는 포기선언이다.
더 나아가 취업과 내 집 마련을 포기한 ‘오포세대’, 인간관계와 미래에 대한 희망까지 포기한 ‘칠포세대’ 등의 용어까지 등장했다. 연애·결혼·출산에 대한 젊은 세대의 의식이 변화한 탓도 있지만 우리 사회의 미래를 어둡게 하는 현상인 것만은 분명하다.
세계적인 경기침체와 내수 시장 위축에 따른 저임금과 높은 생활비용이 원인으로 거론된다. 일리가 있다. 그러나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이러한 현상의 이면에서 다른 구조적인 문제를 발견할 수 있다.
혹시라도 나치즘과 동종의 광기가 신자유주의라는 아름답고 세련된 옷으로 갈아입고 우리가 사는 오늘을 휩쓸고 있는 것은 아닐까. 금수저로 대변되는 강자인 기득권층은 그들만의 세상을 점점 더 견고하게 구축하고, 모든 분야에서 이익의 극대화만을 위해 무한궤도로 치닫는 사회 시스템은 인간 삶의 다양한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
사회 구석구석에까지 전근대적인 구호가 앞서는 구조 속에서 효율성, 성과, 시장 논리의 그물망에 포획된 우리 스스로가 독립적인 성인이 아닌 캥거루족 미숙아들을 양산해내고 있는 셈이다.
성인이 된다는 것은 스스로 결정과 책임을 질 능력을 갖춘다는 말이기도 하다. 일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는 몸으로 성장을 했지만, 일할 수 있는 기회조차 없고 그래서 사랑하겠다는 결정도 내릴 수 없으면 성인이 아니다. 경제적 독립도 하지 못하고 사랑할 수 있는 자기 선택권도 포기해야 한다면 한 인간으로서 미숙아다. 누구의 책임인가.
어제는 귄터 그라스가 타계한 지 1년째 되는 날이었다. 마침 안산 단원미술관에서는 판화와 조각 분야에서도 명성을 날린 귄터 그라스의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몸만 훌쩍 커버린 채 독립을 하지 못한 우리의 삼포세대에게서 양철북의 오스카를 다시 발견한다. 삼포세대가 두드리는 절박한 양철북 소리를 새로 당선된 나라일꾼들이 잘 들어주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김동언 경희대 아트퓨전디자인대학원 아트기획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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