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카페] 우리는 부끄러움을 아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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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움을 모르는 사회는 정의가 실종된 사회다. 약 2300년 전 맹자(孟子)가 살던 중국은 새로운 철기문명의 확산으로 무기가 발전되면서 제후국들 사이에 영토 쟁탈전이 치열하게 벌어지던 혼란한 정국의 ‘전국(戰國)시대’였다. 

맹자는 제후국들을 돌아다니면서 군주들에게 너그러움의 정치를 펼치라고 호소했다. 리더의 덕목으로 의(義)를 역설하며 의가 실현되는 단초로 수오지심(羞惡之心)을 들었다.

수(羞)는 자신의 옳지 못함을 부끄러워하고, 오(惡)는 남의 옳지 못함을 미워하는 마음이다. 이 부끄러움이 반성과 개선을 끌어내는, 사람을 사람답게 만들어주는 요소이자 사회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원동력으로 본 것이다. 정의로운 사회는 부끄러움을 아는 사회다.

 

역사는 반복된다. 우리가 사는 시대의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물결은 철기문명이 확산되던 전국시대, 맹자의 세상과 비교가 된다. 강대국 중심의 세계질서 재편과 약소국 침탈, 자국 이익의 극대화만을 위한 치열한 경제 전쟁은 맹자가 보았던 전국시대 약육강식의 시대상과 매우 흡사하다.

 

오늘날 맹자가 돌아온다면 강대국들에게 그들만을 중심으로 설정된 정의는 잘못된 것이며 함께 살 수 있는 상생의 정치를 펼치라고 할 것 같다. 정치가와 기업인들을 향해서는 대량의 정리해고, 비정규직으로 내몰리는 미생의 근로자들, 극도로 치닫는 양극화 문제들을 진정으로 해결하고 개선해야 한다고도 할 것이다.

 

인간 삶의 다양한 가치가 무시되며 단지 효율성, 성과, 시장 논리라는 잣대로만 평가되는 사회 시스템은 민생을 점점 어렵게만 만든다. 

그 시스템이 주창하는 아름답고 희망에 찬 슬로건의 이면에서 자본의 이익과 욕망으로 무장한 민낯과 만나게 된다. 자본과 권력이 정의를 제멋대로 규정해 놓고는 국민들에게 따르라 하니, 2300년 전 전쟁과 수탈로 혼란하던 전국시대에서 인류는 한걸음도 진보하지 못한 셈이다. 부끄러운 일이다.

 

문화융성이라는 이 정부의 멋진 기치 아래에서도 경제가 어려우니 문화예술계는 기관마다 예산 삭감이 현실이었다. 그런데 최근 여러 곳에서 돈이 풀리고 있다. 어느 곳간에서 나온 예산인지 몰라도 심증은 있다.

선거철이 온 것이다. 문화예술계 인사와 예산을 정치권이 장악한 이유를 알 것 같다. 사업의 이면에서 선거를 겨냥한 목적성이 포착된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후안무치(厚顔無恥)의 정치다.

 

최근 이준익 감독의 영화 ‘동주’가 문화계에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5억 원의 초저예산 제작비로 100만 관객 돌파를 목전에 두고 있다. 윤동주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서점의 종합 베스트셀러 상위에 올라있다. 

시인 윤동주는 일본 제국주의 강점기에 적극적인 행동 대신에 시인으로 산다는 일에 괴로워했다. 거대하고 폭력적인 제국주의의 부끄러운 정의 앞에 ‘부끄럽지 않기’ 위한 그의 삶이 우리가 처한 현실과 겹쳐지며 큰 울림으로 다가온 듯하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서시’ 중에서)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낸 주신 학비를 받아 대학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를 들으러 간다....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쓰여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쉽게 쓰여진 시’ 중에서) 영화 속 시인 정지용은 청년 동주와 마주한 자리에서 부끄러움을 아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게 부끄러운 거라고 한다. 부끄럽지 않은 시인 윤동주가 우리를 참 부끄럽게 한다.

 

김동언 경희대학교 아트퓨전디자인대학원 아트기획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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