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책들이 쏟아져 나온 것이다. 필사 다이어리와 시인들의 시를 베껴 쓰는 책에서부터 ‘어린 왕자’, ‘데미안’ 등의 명작, ‘플라톤의 대화’ 같은 인문 서적까지 종류도 다양했다. 만년필을 비롯한 각종 필기구들도 함께 구비되어 있었다. 자연스레 옛 추억 하나가 떠올랐다.
중학교 입학 선물로 받은 만년필로 김현승, 윤동주, 한용운, 한하운, 릴케의 시들을 꼼꼼하게 적어 넣었던 작고 이쁜 노트. 기억 속에만 남아 있는 필자의 사춘기 시절 필사 공책이다. 손글씨로 적었던 시 한편 한편은 이후 40년간 마음의 밭을 일구어준 소중한 자양분이 되었다.
‘베끼어 쓴다’는 뜻의 필사(筆寫)는 인류 문명 발달의 대동맥 역할을 하였다. 인류의 직립보행과 자유로운 손의 사용이 언어의 발달, 문자의 활용, 문명의 탄생으로 연결된다는 것이 학자들의 견해다. 손으로 그리거나 쓰는 행위나 정교하게 도구를 제작, 활용하는 능력이 인간의 두뇌 발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것이다.
특히, 손으로 문자를 쓰면서 지식의 집적과 정보 전달이 훨씬 쉬워지고 인류는 급속도로 진화할 수 있게 되었다. 종이와 인쇄술이 발명되고 나서도 직접 글씨를 써서 책을 만드는 사본시대는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메소포타미아의 고대 바빌로니아와 아시리아의 도서관들에서는 점토판 필사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서는 파피루스 필사가 이루어졌으며, 중세 유럽 수도원에서의 필사작업은 고대 문화를 후세에 이어주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렇게 전승된 필사 고전들이 르네상스 운동의 기반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우리나라에서도 고대로부터 필사는 종교를 비롯해 교육, 정치, 행정 분야에서 널리 이루어졌다. 한글자마다 절하며 정성을 다하는 일자일배(一字一拜)의 불경 필사 전통이 고려의 팔만대장경을 낳았고, 조선시대의 위대한 기록문화가 오늘날까지 전해질 수 있었던 것도 필사의 덕이다.
소리를 내어 책을 읽고 글자를 암기하면서 필사하는 전통적인 교육방식도 오감을 모두 사용하기 때문에 책의 내용을 이해하는데 매우 효과적이었다.
디지털과 속도문화로 대변되는 현대문명에서도 필사의 전통은 여러 형태로 전승되고 있다. 문인들의 필사는 필력 향상의 수단으로 잘 알려져 있다. 좋은 글을 따라 쓰다 보면 종이 위에 적힌 내용뿐만 아니라 작가의 깊은 내면세계와 만나게 되고 그 정신세계를 표현하는 방식을 익히게 되어 글솜씨가 좋아지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공부나 지식의 전수를 넘어서 자기성찰을 위한 힐링의 문화로 필사의 모습이 변해간다. 컴퓨터 화면과 스마트폰으로부터 벗어나 펜을 들고 한 글자씩 적으면서 조용히 자신만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필사의 단점은 느림에 있다. 정신을 차릴 새 없는 빠른 속도의 문명에 흔들리는 현대인들에게 이제는 느림이 강점이다. 인간과 자연을 생각하는 슬로푸드나 걷기가 각광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속도를 거스르며 조용하게 마주하는 필사의 시간은 자기 인생의 나침반을 들여다보면서 삶의 에너지를 무한대로 넓혀준다. 느림의 미학이다.
이번 연말에는 대학 시절에 아내가 선물한 만년필로 좋은 글귀를 담은 손글씨 연하장을 적어 보내야겠다.
김동언 경희대학교 아트퓨전디자인대학원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