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역시 무대 중앙에서 아기 예수를 품에 안은 채 우아하게 미소 짓는 마리아 역할을 욕심내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다행히 일찍 ‘분수’를 안 까닭에, 목자 3이라도 감지덕지였다. 맞은편에 서 있는 동방박사들에 비해 한없이 누추한 옷차림이라도 무대 위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얼마나 뿌듯했는지 모른다.
동방박사와 목자를 한꺼번에 등장시키는 게 성경과 맞지 않는다는 걸 그 때는 몰랐다. 동방박사는 『마태복음』에 나오고, 목자는 『누가복음』에 나오며,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은 아예 예수 탄생 이야기를 싣지 않았다는 걸 안 것은 한참 뒤의 일이다.
교회 안에서는 좀체 ‘왜’라는 질문이 허용되지 않기에 스스로 답을 찾아야 했다. 말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 예수를 경배하러 온 목자가 연극에서처럼 그럴듯한 직업이 아니라 천직이요 죄인이었다는 발견은 내 신앙의 역사에서 거의 ‘코페르니쿠스 혁명’에 버금가는 사건이었다.
당시의 목자를 상상할 때 대관령 목장 같은 낭만적인 풍경을 떠올리면 안 된다. 그보다는 주인 소유의 양떼를 몰고 다니며 풀을 먹이는 일종의 하청직업에 가까웠다. 그러다보니 남의 땅에 들어갔다가 도둑으로 몰리는 일이 다반사였다. 행여 양을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주인에게 손해배상의 책임을 져야 했다. 양떼를 몰고 멀리 갈 때는 안식일을 지키지 못하니, 목자라는 직업군은 언제나 죄인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았다.
『누가복음』의 저자는 천사로부터 아기 예수의 탄생 소식을 가장 먼저 들은 이도, 듣고서 아기 예수를 찾아가 가장 먼저 경배한 이도 목자들이라고 전한다. 이들에 앞서 ‘가이사 아구스도’, 곧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언급되기도 하지만, 그 이름은 어디까지나 엑스트라일 뿐, 주인공이 아니다.
이름조차 알 수 없는 목자들, 곧 무명의 죄인들이 크리스마스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있다. 가난하고 힘없고 버림받고 눌린 자들이 신탁(神託)을 받아 이루는 존재들이지, 다른 이들이 아니다.
그러고 보니 예수의 부모도 로마 황실 소속의 왕족이나 귀족이 아니었다. 오죽 가난하고 무력하면 마구간에서 아기를 낳는단 말인가. 백화점에서 고르고 고른 근사한 요람이 아니라 더러운 말구유에 누운 아기는 또 얼마나 불쌍해 보이는가. 세상을 구원할 그리스도의 탄생치고는 너무나 소박하다 못해 차라리 비천하지 않은가.
『누가복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는 대놓고 아우구스투스와 맞장을 뜬다. 희랍세계의 최고신 제우스의 아들 아우구스투스의 탄생은 요란하고 벅적했다. 이에 반해 히브리세계의 유일신 야훼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탄생은 고요하고 적막하기만 하다. 어찌나 미미한지 눈 여겨 보지 않으면 선뜻 알아채기 어려울 만큼.
그 예수가 해마다 아기로 세상에 오니, 이것이야말로 기적이겠다. 마구간에 익숙한 아기가 크고 웅장한 교회 건물을 낯설어할 것은 분명한 일이다. 백화점과 거리의 상점들에서 시끄럽게 흘러나오는 크리스마스 캐럴을 들으면 울음보를 터뜨릴 테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마구간을 가득 채우던 천사의 노래는 어디로 갔을까. 아우구스투스의 불의한 권력과 재물을 탐하는 이들만 득실대고,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은 실종된 이 땅에서 하늘의 평화는 과연 어디로 임할까.
구미정 숭실대 기독교학과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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