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국제관계를 놓고 여러 가지 견해가 표명되고 있다. 그 중의 하나가 소위 ‘투키디데스의 함정’(Thucydides trap) 이다. 기원전 5 세기 말, 펠로포네수스 지역의 강자로 군림하던 스파르타에 대하여 신흥 강국 아테네가 도전하여 30년간의 그리스 패권을 다툰 전쟁을 지칭한다. 그래서 미국과 중국이 충돌할 것이라는 견해다. 국제관계의 함정 중에는 ‘홉스의 함정’(Hobbesian trap) 이라는 것도 있다. 막강한 적대적인 두 개의 세력 사이에는 상대의 공격을 예방하기 위하여 선제공격(preemptive strike)을 하기 쉽다는 것이다.
지금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테러사태는 ‘마키아벨리의 함정’(Machiavellian trap)으로 볼 수 있다. ‘한비자의 함정’으로도 표현할 수 있다. 한비자가 마키아벨리 보다 1800년 전에 이미 같은 생각을 개진하였기 때문이다. 한비자/마키아벨리는 오랫동안 계속되는 전쟁 즉 무질서 상태를 종식 시키기 위하여는 이상이나 도덕을 내세우지 말고 오로지 효율과 성과를 중시하는 철저한 현실주의정치(realpolitik)를 적용하여야만 질서를 이루어 낼 수 있다고 믿었다.
서양은 냉전을 민주주의와 독재의 대결로 표현하고 민주주의의 승리로 냉전의 종식을 설명하였다. 그리고 후쿠야마나 헌팅턴 같은 이론가들은 냉전 이후 21세기의 세계를 민주주의 시장경제의 세계 지배 또는 문화의 충돌로 묘사하면서 독재에 대한 민주주의 이념의 중요성을 더욱 부각하기에 이르렀다. 민주주의가 지금까지 인류가 만들어낸 최선의(또는 처칠의 말을 빌리면 가장 덜 나쁜) 정치체제임에는 틀림없다. 민주주의를 결코 소홀이 할 수 없다. 우리의 최선의 이상이다. 민주주의와 독재의 대결은 인류의 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하고 있다.
문제는 한비자/마키아벨리가 직면하였던 무질서의 상황, 즉 한비자/마키아벨리의 함정에 빠져있는 지역이나 상황에 대하여 독재와 민주의 이분법을 적용하려고 할 경우다. 우리에게 닥쳐 오는 것은 언제나 민주주의와 독재 사이의 선택이 아니다. 지역에 따라 질서와 무질서 사이의 선택이 될 수 밖에 없는 경우가 있다. 이라크와 리비아에서 독재를 제거한 다음에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무질서였다. 시리아에서도 독재를 제거하겠다는 숭고한 목적이 실현되지 못하고 무질서의 지역이 점차 증가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 상황을 IS등이 악용하고 있는 것이다.
지구상의 모든 지역을 민주-독재 사이의 선택으로 만들 수 있다면 아주 좋은 일이다. 그러나 지구상에는 한비자/마키아벨리의 함정에 빠져있는 지역이 있게 마련이다. 헨리 키신저의 말 처럼 민주주의도 우리가 살아남은 후에 가능한 것이다. 어쩌면 아프리카와 중동 지역의 인구가 매 세대 마다 배증하고 있는 냉엄한 현실을 감안하면 무질서가 더 증가하는 것이 우리가 당면한 현실인지도 모른다. “어떠한 나쁜 정부도 무질서 보다는 나쁘지 않다”는 레알폴리틱의 격언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한비자와 마키아벨리가 실패와 좌절로 점철된 일생 속에서도 후세를 위하여 남긴 교훈이다.
최영진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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