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시론] 영웅을 만들어 주는 사회

전대양.jpg
지난 30일 ‘트렁크 살인사건’의 피고인 김일곤에 대한 첫 공판이 열렸다. 김일곤은 법정에서 뉘우치는 기색 없이 도리어 자신의 살생부 명단에 있는 사람들을 조사해 달라는 뻔뻔함을 보였다. 잔혹한 사이코패스 범죄임에도 불구하고 추가 인명 살상으로 이어지지 않은 데에는 경찰과 시민들의 공이 컸다.

김일곤을 직접 검거한 김 경위와 주 경사, 범인을 처음 신고한 어느 종합동물병원 간호사, 범인이 김일곤임을 특정한 임 경위, 경찰이 칼을 든 범인을 쓰러뜨리자 흉기를 빼앗아 검거에 도움을 준 시민들.

이들 중 한 사람이라도 없었더라면 김일곤 검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가 빨리 검거되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더 큰 사회적 충격과 공포가 휘몰아쳤을까.
경찰청은 김일곤을 직접 검거한 두 경찰관에게는 1계급 특진을, 검거 작전에 투입된 경찰관들에게는 표창을, 검거 과정을 도운 시민들에게는 용감한 시민상을 수여했다.

환영할 일이다. 흉악범을 검거하는 데 크고 작은 도움을 준 숨은 영웅들을 배려한 것이다. 하지만, 트렁크 살인사건 현장을 감식하여 범인이 김일곤임을 밝혀낸 감식요원들에 대한 배려는 보도되지 않아 섭섭한 감이 있다. 위와 같은 일들을 보면서 우리 사회가 이러한 작은 영웅들을 잘 대우하고 있는지는 생각해 볼 일이다.

경찰이나 군인, 소방 공무원 등은 시민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생명과 신체를 담보하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이들은 높은 직업윤리와 소명의식으로 무장되어 있다. 지난 6월, 미국 신시내티에서 벌어진 총격전 현장에 출동했다가 숨진 한국계 경찰인 소니 김씨에 대한 추모 행렬은 이틀 만에 10만 달러의 모금으로 이어졌다.

필자는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들의 군인, 경찰관, 소방관 등에 대한 우대 풍토와 이름 없는 영웅들을 배려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부러움과 부끄러움이 교차했다.

미래 세대 경찰을 양성하는 일원으로서, 후배와 제자들에게 사명의식만을 강요하지는 않았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우리사회는 국가와 사회를 위해 봉사하고 희생하는 사람들에 대한 평가에 박한 면이 있다.

코레일은 군 장병 철도이용 할인제도를 올해부터 없앴다가 다시 부활하기로 했다. 국가를 수호하는 군 장병들의 노고를 무시한다는 비판 때문이었다. 반면 LG에서는 지난 21일 철길로 뛰어든 장애인을 구하려다 순직한 고 이기태 경감에게 의인상을 수여하고 위로금 1억 원을 전달했다. 상반되는 행보가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는 OECD에서 치안안전도 6위를 기록하고 있으며, 외국인들도 우리 치안의 우수성을 가장 만족하는 분야로 꼽고 있다. 이러한 성과를 기록한 것에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일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흉기를 휘두르는 범죄자를 맨손으로 제압하는 경찰, 혹한의 추위 속에서 철책선을 지키는 군인, 화염을 뚫고 생명을 구하는 소방관들, 그리고 이들의 노고를 치하하고 발 벗고 나서는 용감한 시민들이 있어 심리적 안전도도 함께 높아지고 있다. 우리 시대 진짜 영웅들은 이들이다. 숨은 영웅들을 잘 대우하는 사회야 말로 보다 성숙한 사회가 아닐까.

전대양 가톨릭관동대학교 교수, 한국범죄심리학회 회장

© 경기일보(www.kyeonggi.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댓글 댓글 운영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