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경찰서 창설 70주년 ‘대한민국 여주경찰 이야기’ 특별기획전

시민의 지팡이 70년 민생치안 ‘파노라마’
16일~12월20일까지 여주박물관서 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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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시민과 애환을 함께해 온 여주경찰서가 창설 70주년을 맞아 지난 역사를 되돌아보게 하는 ‘대한민국 여주경찰 이야기’ 특별기획전을 오는 16일부터 12월20일까지 여주박물관에서 개최한다.

 

올해 대한민국 광복 70주년과 경찰 창경 70주년, 여주경찰서 창설 70년을 기념해 열리는 이번 특별기획전은 1945년부터 여주 시민과 함께해 온 여주경찰의 역사와 발자취를 스토리텔링 형식으로 구성해 전시된다.

 

이번 특별기획전을 준비해 온 엄명용 여주경찰서장은 “여주시민과 70년의 애환을 함께 해 온 여주경찰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게 만들었다”며 “역대 63명의 여주경찰서장 중에서 이근표ㆍ윤웅섭(경기, 서울청장)ㆍ조용연(충남, 울산청장) 청장과 직전 정성채 서장 등 4명의 역대 서장들을 모시고 여주경찰 70년의 발자취를 다양한 장르의 전시물(계급장과 수첩, 경찰복 등)을 감상할 수 있게 했다”고 설명했다.

 

특히 여주경찰서는 창설 70주년을 기념해 경찰서 담장에 벽화 그리기 작업을 벌여 남한강 100리 길과 주요 관공서, 남한강 여주보 등 3개 보, 여주팔경 등 명소와 구름·나비(희망·행복·사랑·봄·따뜻함) 등이 벽화로 표현, 여주의 아름다움을 홍보한다. 

남한강을 끼고 있는 여주는 ‘여주목’이라는 행정관청이 설치된 수운의 교통 중심지이자 역사적·지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전략 요충지로 그 곳의 주민들의 삶에 여주경찰 70년의 역사도 함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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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포도대장.
■여주경찰의 역사
조선시대의 여주경찰은 지방관청인 여주목사가 행정 및 사법업무 일체와 육방 중 병방과 형방이 경찰사무를 담당했다.

 

당시 여주경찰은 총순 1명, 권임 2명, 순검 9명으로 구성된 여주분소가 설치되어 치안업무를 담당했다.

 

1469년 여주목(여주목사가 현재의 경찰권 행사)설치, 1910년 당시 여주군 주내면(현 여주시 창동)에 여주분귀소가 운영됐다.

 

1945년 10월 21일 국립경찰 창설로 정식 여주경찰서 창설(1개 주재소 및 7개 지서 담당, 정원 35명) 2011년 10월 남한강경찰대가 개설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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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경찰.
■일제강점기
1910년 8월 여주군 주내면에 여주분귀소를 설치, 헌병 2명과 한인 보조원 2명을 배치해 총 4명이 여주치안을 담당했다.

1919년 8월 헌병제도를 폐지, 여주면 홍문리 15번지에 여주경찰서를 설치, 점동·가남·이포·개군·북내·강천·대신면 등 총 7개면에 주재소를 설치했다. 

 

■건국 초기
1945년 8월15일 광복 이후, 도지사 산하에 경찰부가 설치돼 1946년 초대 민선 여주경찰서장으로 석광태가 임명됐다. 

 

이후 10월21일 국립경찰 창설과 동시에 여주경찰은 군 자위대로부터 경찰서를 인수받아, 정식으로 여주경찰서를 개설했다.

 

제19구 경찰서(여주경찰서)로 정원 35명의 경찰관이 여주읍과 7개면, 1개 주재소와 7개 지서를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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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5년 말을 타고 순찰하고 있는 여주경찰서장.
 
■건국 이후
한국전쟁 이후 경찰은 전투경찰체제로 통합돼 보급과 및 경찰병원이 설치되는 등 비상사태에 대처하기 위한 조직으로 개편됐다. 한국전쟁 동안 여주경찰은 2명의 순경이 순직했고, 경찰서 본청 및 능서와 강천지서가 소실돼 여주초등학교 강당을 임시경찰서로 사용했다. 
 
휴전 이후 1956년 9월 여주경찰서 신청사가 준공됐으나, 1956년 11월19일 화재로 인해 청사 본관이 전소해 한동안 부속건물에서 경찰업무를 담당했다. 1957년 11월 여주읍 창리 162번지로 현재 여주경찰서를 이전해 사용해오고 있다. 
 
 
■1960년부터
1960년대 경찰은 북한 공비침투를 방어하는 역할을 군과 함께 담당했다. 1968년 1월21일 김신조 무장공비 사건과 69년 흑산도에 침입한 공비 소탕 작전에서도 맹활약을 펼쳤다. 여주경찰은 1개 주재소, 8개 지서를 담당하게 됐고 1968년 경찰서장 계급이 총경으로 승격됐다. 
 
여주경찰서는 지역내 치안유지와 군민체육대회 및 동아방송 공개방송 노래자랑 등 각종 행사의 개최장소로 경찰서 광장이 제공돼 주민과 가까워지는 계기가 마련됐다.
 
■1970년대
1970년대 경찰조직의 개편과 경찰행정 및 경찰의 처우개선과 복지의 향상에 주력했다. 1974년 8월 15일 박정희 대통령 저격사건을 계기로 기존의 치안국을 치안본부로 격상시키고, 치안본부장을 차관급 대우로 격상시켰다. 또한 1970년대 인구의 증가에 따른 치안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경찰서 및 지·파출소의 신설이 지속적으로 이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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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여주경찰서 전경.
■1980년대
1981년 가남지서를 개축했고 1988년 여주경찰서 신청사가 준공, 1985년 여주경찰서 민원실 준공으로 위민 경찰행정이 현실화됐다. 1989년 산북출장소가 파출소 승격으로 여주지역 10개 파출소를 관할하게 되었다. 
 
■오늘날의 여주경찰
내무부 외청으로 승격된 경찰은 시도지사의 보조적인 기관에서 독립된 독립관청으로 승격됐다. 경찰조직의 독립과 동시에 경찰위원회제도를 도입해 민주적 통제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한 기초적 토대를 마련했다. 

 

여주경찰은 2003년 지역경찰제가 도입으로 직제가 개편돼 3개 지구대 및 산북파출소, 6치안센터 체제로 변경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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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경찰서 담장벽화.
2006년 북내, 능서, 대신 치안센터가 파출소로 승격, 현재 1실 6과 16계의 편제를 갖추고 있다. 여주시 관내의 파출소로 3개 지구대, 4개 파출소가 있다.

 

여주경찰은 각종 범죄예방활동과 청소년 선도, 지역봉사, 환경감시 등의 분야에서 12만 여주시민과 함께하는 지역사회 경찰로 활발한 치안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특히 1990년대부터 남한강 유원지를 찾는 피서객들을 위해 연양리에 여름파출소 운영과 이포보에서 강천보에 이르는 남한강 수상과 수변구역의 치안을 담당하고자 2011년 남한강경찰대를 설치해 운영하고 있다. 

 

여주=류진동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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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여주경찰서 전경.
 
인터뷰 엄명용 제64대 여주경찰서장
뒤돌아 본 과거 통해 ‘미래 조명’ 
시민들과 ‘안심도시 만들기’ 최선
Q 광복 70년 경찰 창설 70년, 여주경찰 70년의 의미는
A 여주경찰 70년의 역사 전시를 기획한 의미는 현재의 치안도 중요하지만, 과거의 경찰이 가졌던 역사적인 역할, 그 기록물을 다시 한 번 회고하고 앞으로의 70년을 준비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한반도 중심에 있는 여주는 교통과 물류의 중심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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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는 역사적으로 이포 조세창 등 정부 조세창이 2곳이 있던 곳으로 역사적 의미가 매우 높다. 여주는 작은 도시지만 한강상수원보호 지역이라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 왔다. 개발이 제한되다 보니 발전을 할 수 없어 인구가 30년 동안 10만여명이 그대로 유지됐고 치안도 안정적으로 유지됐다. 
 
Q 여주경찰 앞으로의 70년 준비는
A 대한민국 수도 서울에서 상수원보호에 대한 역할은 매우 크다. 상수원보호 지역인 여주는 앞으로 자연친화적인 문화ㆍ관광의 도시로 발전할 것으로 전망된다. 

 

여주경찰은 문화ㆍ관광도시의 여주경찰로 그 역할을 충분히 담당할 수 있도록 차분히 준비하겠다. 여주는 영동고속도로와 제2영동고속도로, 중부내륙고속도로 등 한반도 중심의 교통 요충지로 역할도 지대하다. 물류와 사람의 교통에 있어 경찰의 역할이 절대적이다.
 
Q 여주시민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
A 치안은 경찰관이 주로 담당하지만, 경찰 혼자 할 수는 없다. 여주시민들이 범죄와 사건 사고 현장을 목격했을 때 경찰에 빠른 신고를 당부한다. 안전과 관련된 좋은 정보와 의견 있으면 언제든지 경찰과 공유해 함께 만들어가는 여주치안이 될 수 있도록 간곡히 부탁한다.

 

여주=류진동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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