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일 벗은 위례성의 실체… 그곳은 하남 춘궁·교산동이었다

초기백제 ‘왕성터’ 재조명

▲ 이성산성에서 바라본 춘궁동(궁안마을).

하남시 춘궁ㆍ교산동 일원이 초기 백제의 왕성 터로 재조명되고 있다.

그동안 학계 대부분은 서울 송파구 풍납토성이 초기 백제의 왕성 터라고 정설로 받아들이는 분위기여서 상대적으로 유구ㆍ유적 발굴이 뒤처져 있던 하남지역은 벙어리 냉가슴 앓듯 그저 바라만 봤다.

문화재 발굴사업이 발전하기 이전, 삼국사기 등 옛 문헌에는 백제의 첫 도읍지(위례성시대(慰禮城:BC 18년~AD 475년))를 춘궁ㆍ교산동 일대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최근 풍납토성의 왕성터 진위를 놓고 학계의 이견이 팽팽히 맞서면서 하남지역이 급부상하고 있다. 이에 본보는 옛 문헌과 현재 하남지역에 흩어져 있는 유구와 유물 등을 바탕으로 재조명해 봤다.

■ 풍납토성, 한성백제 왕성터 진위 논란

풍납토성은 지난 1961년 첫 발굴이 시작됐다. 지난 1997년 기와 등 대규모 유물이 발견되면서 학계 대부분은 풍납토성이 백제 초기 왕성터라고 확신했다. 현재까지도 이 학설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그동안 발굴조사에서 왕성임을 뒷받침할 만한 결정적 유구ㆍ유물이 아직 나오지 않았다는 점에서 진위논란이 시작됐다. 서울 풍납토성 사적지 및 환경대책위원회는 최근 서울프레스센터에서 ‘서울 풍납토성 백제왕성 심포지엄’을 가졌다. 열띤 공방이 이어졌다.

이날 심포지엄에서 풍납토성의 한성백제 왕성론을 펴는 패널들은 “지금의 서울에 백제가 도읍하던 한성기의 도성이 맞다. 학계의 인식이 다르지 않다”는 주장이 대부분이다.

 

▲ 천왕사지 주춧돌.

반면, 반박 패널들은 “침수 피해가 뻔한데 한강 옆에다 왕성을 짓는 게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느냐? 왕궁 수준과는 거리가 멀다”, “풍납토성에서 발견된 유적 중 왕성 규모에 맞는 주춧돌이 발견되지 않았으며, 풍납토성의 우진육각형(찌그러진 형태의 육각형 구조) 집터 구조 자체가 왕성에 맞지 않는 수준이다”며 조목조목 반박했다.

이 때문에 풍납토성은 왕성이 아니라 군사 방어를 위해 지어진 외성(外城)이라는 주장이 줄곧 제기돼 왔다.

지난 7월 충남 공주 부여, 전북 익산의 백제 유적 8곳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지만 풍납토성이 빠진 것도 이런 이유다.

따라서 왕성터 역시 서울 풍납동이 아닌 지금의 하남지역이라는 의견이 조금씩 설득력을 얻고 있다.

■ 역사의 씨줄과 날줄 중심지는 ‘춘궁ㆍ교산동’

하남시 춘궁동과 교산동 일대가 한성(위례성)시대의 도읍지라고 정확하게 명시된 사료는 아직까지 발견되지는 않았다.

다만, 옛 문헌과 현재 발굴된 사료 등을 종합해 보면 남한산성 북문 밑 춘궁동 일대(궁안 또는 고골)를 백제의 첫 도읍지로 보는 견해는 적지 않다.

한민족의 첫 정사(正史)인 ‘삼국사기’에 기술된 백제 건국신화에서는 위례성의 위치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이 문헌을 토대로 하면 지금의 춘궁동 일원이다. 또한, 춘궁ㆍ교산동 일대에서 한성백제 도읍지로 추정될 만한 유물과 유적지 등이 적잖이 발견됐다.

먼저 동쪽에 남한산성과 검단산(657m)이 있고 서쪽에 이성산성(207m), 남·북쪽에 한강과 비옥한 평야 등이 펼쳐져 있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 이성산성 정상 8각지 9각지.

20여년 전 검단산 정상 부근에서 동명성왕(주몽)에 제(祭)를 지냈던 제단으로 추정되는 유적이 발견됐다. 이보다 앞서 당시 도읍지 방어시설로 보이는 이성산성 정상에서도 천단(天壇)과 지단(地壇) 등으로 여겨지는 8ㆍ9각 건물지가 발굴됐다.

특히,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온조왕이 백제를 건국한 원년(BC 18년) 동명묘를 세웠다는 사실이 명확하게 기록된데다 이후 나라에 우환이나 왕이 등극한 정월에는 왕이 직접 제를 올렸다는 기록이 8차례나 등장한다.

또, 삼국사기에는 고이왕(8대) 10년 대단(大壇)을 설치해 제를 올렸는가 하면 근초고왕(13대) 2년 천지신에게 제를 올렸다는 기록도 나온다.

이는 이성산성 정상에 천단과 지단으로 추정되는 8~9각 건물지가 발견된 점과 일치하는 대목이다.

게다가 백제에 불교가 들어온 건 제15대 침류왕 원년(384년)이다. 더욱이 춘궁동 왕궁터 남쪽에는 천왕사지(天王寺址)가 자리하고 있는데다 서쪽(고골저수지)으로는 동사지(桐寺址) 등이 오래전에 발굴됐다. 이 사찰 이름과 불사흔적, 규모, 위치 등으로 미뤄 건립시기를 한성백제로 보기에 충분하다.

왕궁지 남쪽 하사창동에 위치한 천왕사는 조선시대까지 사용해 왔다는 게 사료를 통해 확인됐으며 규모면에서도 약 6만㎡에 이르는 큰 사찰이다. 또 춘궁동은 ‘궁안’또는 ‘궁말’ 등이라고 불렸다. 이 명칭을 토대로 이 지역 토박이들은 오랜 동안 백제의 왕궁지가 있던 곳이라고 믿어왔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나 두계(斗溪) 이병도 박사가 춘궁동 일대가 초기 백제의 왕궁지라고 추정했기 때문에 하남 사람들의 그 믿음을 뒷받침했고 지금까지도 이처럼 믿고 있다.

왕궁터를 뒷받침할 지명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상사창동(上司倉洞)과 하사창동(下司倉洞) 등도 마찬가지. 왕궁의 곡식 등을 저장하던 창고(정부의 양곡창고)와 연관됐기 때문에 오래전부터 불린 명칭이 분명하다.

항동(巷洞)이란 지명에 왕궁 주위로 관공서들이 즐비한 골목을 뜻하는 항(巷)자가 들어간 것도 예사롭지 않다.

천왕사지는 어떤가? 고대국가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6만㎡ 규모의 절터가 자리했다는 것은 그 규모로 따져 볼 때 종교적 의미도 있지만 왕과 그 귀족들이 사용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닌 듯싶다.

▲ 교산동 건물지.

특히, 오랫동안 하남위례성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주목받았던 ‘교산동 건물지’ 역시 주목할 곳이다.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목조 건물유적인데다 남한산성의 한 줄기인 객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이 건물지는 북쪽을 제외한 동서남쪽에 대형 건물지가 ‘ㄷ’자 형태로 자리잡고 있으며 그 외곽으로 토루가 둘러싸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왕궁 한복판으로 운하역할을 했던 물자들을 실은 배가 통과할 수 있는 하천이 지금도 흐른다. 경우에 따라서는 해자(垓字) 역할도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바로 덕풍천이다. 이 개천은 바로 한강으로 이어지고 서해 바다로 연결된다. 뭔가 그림이 그려진다. 이 지명들을 씨줄과 날줄로 엮으면 거대하고도 웅장한 왕궁이 눈앞에 우뚝 선다.

■ 천왕사지 주변 유물 훼손 심각

하사창동 340 일원 천왕사지는 국사사적 제422호 지정된 이성산성과 교산동 대형 건물지와 더불어 한성백제 500년(위례성·BC 18~AD 475년)의 역사의 연결고리를 밝혀줄 중요한 유적지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이 일대에서 그동안 애써 발견한 수많은 유물과 유적이 인근 민가의 장독대와 화분대, 댓돌 등으로 쓰이는 등 유실과 방치가 심하다.

마을 주민이 경작하는 밭 한 모퉁이에는 4각 구멍이 있는 심초석(주춧돌)이 방치돼 있다.

또, 이 일대 주민들 집에는 국내 최대 규모의 보물 제332호 광주철불상 8각 좌대(받침대)가 장독대로 사용되고 있는가 하면 추녀 밑에는 천왕사에서 쓰였던 것으로 보이는 장대석과 석물 등이 나뒹굴고 있다. 기둥을 세우기 위해 돌의 표면을 둥글게 깎은 거대한 초석(주춧돌)은 장독대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유물들은 천왕사지의 가람배치를 추정해 볼 수 있는 소중한 유물들로 지난 2000년과 2001년 천왕사지 1·2차 시굴조사 당시만 해도 원형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이 일대는 현재 농수산물창고와 주택, 비닐하우스 등으로 인해 그나마 남아 있던 원형이 파괴되면서 앞으로의 조사 또한 어려운 실정이다.

시 문화재 관계자는 “춘궁동 일대가 한성백제시대의 도성으로 재조명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며 “그러나 이 일대는 대부분 사유재산인데다 창고와 주택 등으로 쓰이고 있어 발굴에 엄두도 못 내고 있는 실정이다”고 말했다.

하남=강영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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