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시론] 욕하는 사회, 시(詩)를 읊는 사회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부끄러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 시인의 ‘서시’이다. 문학가도 시인도 아닌 내가 외우고 있는 유일한 시(詩)이기도 하다. 갑자기 왜 시(詩) 타령인가할지 모르겠으나, 어느 덧 우리사회가 시(詩)가 아닌 욕하는 사회가 아닌가하는 쓸데없는 걱정(杞憂)에서 나에게 문득 떠오른 시(詩)이다.

5월 첫 주, 어린이날을 비롯한 연휴가 이어져서 초·중·고교에서는 5월 단기방학까지 들어선 황금연휴 기간에 우리 아이들의 언어 사용이나 습관을 우려하는 소리들이 많이 들려오고 있다.

어느 방송사에서 초등학생과 중학생들의 평상 시 대화를 녹취한 결과를 보여주면서 “말에 욕을 섞어 쓴다라고 하기 보다는, 욕에 말을 섞어 쓴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는 앵커의 표현이 무리가 아닐 정도. 적절한 대처방안이 마련될 필요가 있다.

우리는 공부를 잘하는 자녀를 두기 위해 또는 유망한 진로 개발을 위하여 사교육이며, 적성검사, IQ검사, 진로상담 등 다방면으로 자녀의 이모저모를 파악하려고 애를 쓴다. 아이가 부모님의 머리를 닮아서 공부를 못한다고 생각하면 지레 미안한 마음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지능은 고정된 것이 아니다.

특히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대학생까지는 아직도 전두엽이 발달하는 즉, ‘사회적 지능’의 발달이 계속되는 성장의 시기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언어발달은 5세 이전에 가장 활발하지만, 사회적 언어나 도덕성과 결부된 언어 발달은 사춘기 시절에 어떻게 형성되느냐에 따라 성인 이후 평생을 좌우하게 된다.

사실, 말투나 말씨로 그 사람의 됨됨이나 인격(人格)을 판단하기 때문에 이 시기에 형성된 말투나 말씨, 언어 습관이 곧 성인이 되어서 그 사람의 격(格)을 좌우하는 경우가 많다. 어떻게 보면, 요즘 같은 자본주의 시대에 맞게 용어를 바꾼다면 사람의 말투나 말씨는 그 사람의 평생 자산(asset) 이나 자본이 될 수 있다.

청년들이 구직 면접을 할 때 가장 두려워하는 것 중의 하나가 태도 또는 매너(manner)인데, 그 중의 말투나 말씨는 그 사람에 대한 호감도를 좌우하므로 청소년기에 학교든 길거리든, 집에서든지 평상시에 써 오던 말투나 말씨는 매우 중요한 습관이나 자산이 될 수 있다.

내가 중고등학교 시절, 국어 선생님이 “시(詩)는 10대와 20대의 감수성이 예민하고 순수한 청년의 시기에 쓰게 된다. 중년에 들어서면 감수성이 무뎌지고 세파에 찌들어서 더 이상 시(詩)가 나오지 않는다”라는 말로 우리에게 “자신의 번뇌나 괴로움, 또는 즐거움이나 만감이 수시로 교차하는 감성을 시(詩)로 써 보라”라고 권하셨다.

윤동주 시인은 20대 독립운동을 ‘시(詩)’로 표현하다가 옥중에서 작고하셨다. 윤동주 시인은 지금의 나에게는 고조 할아버지뻘이지만, 아직도 윤동주 시인의 시(詩)는 나에게는 20대 청년만이 가진 고뇌의 소리로 아름답기도 하고 서럽기도 하다. 우리 시대의 청춘의 목소리가 욕이 아닌 시(詩)로 승화하길 간절히 바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송민경 경기대학교 청소년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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