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같은 나무 수천그루 수원시에 기증… 나눔의 거목
“그저 심고 가꾸기만 하는 것은 진정으로 나무를 키우는 법이 아닙니다.
나무도 기쁘고, 슬프고, 배가 고프고, 아프기도 하죠. 그래서 나무와 대화를 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최근 47억원 상당의 조경 수목을 수원시에 기증한 대우조경의 김병오 사장(80)은 ‘나무를 키우는 법’에 대해 이같이 말한다.
지난 1972년부터 조경 사업을 시작한 김 사장은 40여년간 업계를 지키며 지역사회 조경 발전을 위해 노력해 왔다.
김 사장은 인생의 절반을 함께 해 온 자식같은 수목들을 지역사회의 발전을 위해 선뜻 내놓으며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몸소 실천했다.
이에 시는 고색 중보들공원에 헌수비를 세우고, 오는 31일 식목행사에서 제막식을 열어 김 사장의 이 같은 정신을 기릴 예정이다.
삶의 절반을 바쳐 정성과 사랑으로 길러온 나무들을 시민이 체감할 수 있는 녹지 공간을 조성할 수 있도록 선뜻 내놓아 시민들이 누릴 수 있는 쾌적한 도시 환경을 조성하는데 앞장 선 김병오 사장을 직접 만났다.
다음은 김 사장과의 일문일답.
Q 수목을 기증하게 된 배경이 있다면.
A 여든, 인생의 황혼을 앞두고 이제는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조경 사업이라는 것은 단순히 나무를 심고 가꾸는 것이 아니다. 나무 한그루 한그루마다 자식 키우듯 정성을 다해 애정을 쏟아야하는 일이다.
그렇게 모든 것을 다바친 나무들을 놓고 혹자는 자식들에게 사업을 물려주면 되지 않냐고 묻는데, 나무에 귀를 기울이지 못하는 사람은 조경 사업을 맡을 수 없다.
이 때문에 지난 40여년간 직접 재배해 온 느티나무와 소나무, 주목 등 28종 2천280그루를 시에 기증키로 했다. 지역 사회에 보탬이 되도록 보람된 일을 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들 수목들은 용인과 수원, 평택, 경상북도 영주 등 7개 농장에서 보유·관리하고 있다.
기증되는 수목들은 수형이나 생육상태가 양호하고 대형 수목이 많은데다, 특히 일부 특수목은 그 가치를 금액으로 환산하기 어려울 만큼 고급 수종이기도 하다.
이들이 이식 후 고유수형을 유지하고 고사되지 않기 위해서는 우선 이들 나무에 대한 뿌리 돌림 후 이식 등 안전장치가 필요하다. 사실 시에 수목을 기증한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세번째다.
시에 기증했던 수목들은 현재 수원 연화장과 수원 10전투비행단, 경기도장학관 등에 식재돼 있다. 부끄럽긴 하지만 이 때문에 받은 공로패와 감사패도 수십여개에 달한다. 모두 뜻깊은 재산이다.
Q 조경업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A 수원농생명과학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0여년간 임업지도원을 하다 1972년 수원에서 ‘서울농예상사’라는 이름으로 조경사업을 시작하게 됐다.
1975년에 대우조경으로 회사 이름을 바꾼 뒤 1980년도에 조경식재와 조경시설물 설치 공사업 면허를 받았다. 이후 한자리에서 지금까지 오로지 조경업에만 몰두했다.
이토록 한가지 업에 집중할 수 있었던 것은 분명한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목표는 바로 사람들이 마음껏 숨을 쉴 수 있는 도시, 사계절이 푸르고 투명한 녹색꿈을 키워가는 도시를 만드는 것에 일조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조경사업을 수행할 때면 하자율 제로에 도전하기 위한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등 모든 시민들이 편안하고 안락함을 만끽할 수 있도록 푸르름과 건강이 가득한 공간을 만들고자 연구하고 개발했다.
Q 조경업에 대해 설명해주신다면.
A 1945년 이전 일제 강점기에는 수요자와 공급자가 대부분 일본인들이어서, 국내에는 조경전문가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해방 후 얼마 안돼 발발한 6ㆍ25 전쟁은 온 국토를 황폐화시켰다. 전후 정부는 조림사업을 활발히 전개하면서 양묘사업이 활발해지고 점차 조경시장도 형성됐다.
이 같은 상황에서 외국 수종이 도입된 것은 1957년께 일본에서 처음으로 정원수가 수입되면서다. 당시 재래종 수목만을 보다가 화려하게 개량된 백목련 등의 외국수종을 보고 너나 할 것 없이 감탄사를 연발했다고 한다.
외국 수종을 키우는 방법으로 모체로부터 분리한 어린 가지나 뿌리인 삽수를 심었는데, 뿌리만 내리면 판매가 가능했다.
그런 이유로 당시 제일 어려웠던 일은 수입종의 삽수를 구하는 것이었다. 이후 묘목이 잘 팔리면서 번식 기술도 많이 발전해서 삽목기술, 접목기술, 파종기술 등 놀랄만한 발전을 이뤘다.
향나무, 노각나무 등 각질이 두꺼운 나무의 종자도 냉동을 이용해 휴면을 타파하는 방법이 개발됐고, 철죽 등에 녹지삽 기술이 개발돼 짧은 기간 내에 다량의 번식이 가능하게 됐다.
이런 번식 기술은 어디까지나 조경업계의 전문가만이 가능한 기술이어서 조경업자들의 고유한 영역으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1960년 중·후반부터는 조경업이 인기가 많아지고 조경수가 아주 고가에 매매되는 등 호황을 누리게 됐으며, 당시 향나무 묘목이 제일 잘 팔렸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관리비가 많이 들고 일일이 손으로 털어주고 다듬어줘야 하는 등의 이유로 향나무의 인기는 시들해졌다. 그 밖에 메타세쿼이아, 플라타너스, 수양버들, 자산홍, 회양목, 향나무, 느티나무, 단풍나무 등 외국의 많은 신품종들이 속속 수입돼 주기적으로 호황과 천대를 반복하게 됐고, 영리를 목적으로 수목에 많은 투자를 했던 업자들의 희비가 엇갈리는 사례가 매우 많았다.
현재는 관리가 쉬운 소나무가 많이 심어지고 있다. 물론 소나무도 약점을 가지고 있다. 소나무는 병충해가 심해 재선충병에 취약한데, 재선충병은 감염되면 100% 말라 죽기 때문에 일명 ‘소나무 에이즈’로도 불린다.
Q 조경업을 하며 이루고 싶었던 꿈은.
A 나무와 대화를 할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나무를 키우다보면 배가 고픈지, 비료가 필요한지, 그렇다면 어떤 비료를 줘야하는지, 약을 주면 무슨 약을 필요로 하는지 등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식, 아니 딸처럼 길렀다’는 말이 맞다.
직접 기른 조경수들이 모두 내 여식같은 마음이다.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 정성스럽게 키우지만 결국은 떠나보내야 할 때가 오는 것 역시 같다. 제때 좋은 곳으로 시집을 보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대로 그 자리에 두면 나무들끼리 들러붙거나 썩게 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나무들을 다른 곳으로 보내야 할 때는 정말 시집을 보내는 기분인 것만 같았지만 결코 아쉽지만은 않다. 시집만 잘 가면 몇백년, 몇 천년도 사는 나무가 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 시에 모든 수목을 기증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뒤에는, 여태껏 키워온 나무들을 전부 시집 보내는 마음이었다. 나무가 모두 옮겨지면 부모로서 ‘내 할 일은 다 했다’는 기분이 들 것 같다.
Q 향후 계획은.
A 공공조경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생활 속에서 체감할 수 있는 녹지 공간을 만들고 시민들이 이에 참여하고 누릴 수 있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요즘 사람들은 10분만 걸으면 녹지를 쉽게 접할 수 있다. 어쩌다 한번씩 가는 대규모 공원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체감하는 작은 녹지가 진짜 공원인 것이다.
시민들이 나무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들이 생활 속에서 얼마나 많이 녹지의 혜택을 누리고 있는지를 느끼게 된다면 평생을 조경에 몸담고 살아온 보람이 있다고 생각한다.
뒤돌아 볼 여유조차 없이 반평생 넘게 조경업에 삶을 바쳤으니, 이제는 그 녹지에 자연스레 녹아들어 편안하게 즐기며 쉬고 싶다.
김예나기자
사진=전형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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