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계배 한국예술인복지재단 대표이사
2011년 안양에서 시나리오 작가 최고은(32)씨가 숨진 채 발견됐다. 생활고에 시달리던 예술인의 죽음에 각성한 우리는 ‘예술인복지법’과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이하 재단)’을 탄생시켰다. 그러나 ‘춥고 배고파야 예술이 나온다’는 인식이 강한 사회에서 예술인에 대한 복지가 쉽게 이뤄질 리 만무했다. 특히 이를 진두지휘해야 하는 재단은 2012년 출범 이후 지난 1년여 간 수장이 공석인 상태에서 ‘아비 없는 설움’을 겪으며 이렇다할 성과를 내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와 관련 박계배 한국예술인복지재단 신임 대표는 “예술인 복지는 ‘공짜밥’이 아니라, 힘들어 주저앉은 이들을 일으켜 세우는 ‘지팡이’여야 한다”면서 “무엇보다 예술인 복지의 필요성과 방법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지난 11일 재단 사무실에서 만난 박 대표는 아버지가 되어 재단 구성원들을 보듬으며 뭔가 다른 내년을 계획하는 모습이었다. 그는 인터뷰 내내 “예술인을 비롯한 모든 사람의 인식 개선이 중요하며, 그것을 이끄는 재단이 돼야 한다”며 뚝심 있는 철학을 강조했다. 다음은 박 대표와의 일문일답.
Profile
박 대표이사는 오랫동안 대학로에서 일했던 연극인이다. 1980년대 샘터파랑새극장 극장장을 비롯해 한국연극협회 이사장, 국립극단 이사 등을 지내 행정 경험도 풍부하다. 2005년부터 2012년까지 한국연극인복지재단 이사로 활동해 예술인들의 복지 향상도 힘썼다.
Q 지난 10월 취임해 한달이 조금 넘었다. 직접 본 재단은 어떠한가.
A 밖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는 곳일까’하는 생각을 가졌던 게 사실이다. 막상 보니 직원들이 굉장히 열심히 일하고 바쁘게 돌아가는 조직이다. 평가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던 것 같다. 홍보가 안돼 너무 조용했다.
Q 취임하면서 어느정도 시끄럽게 홍보가 된 듯 하다. 박 대표가 줄곧 예술과 복지 현장에서 활동했음에도 일부 언론은 ‘낙하산’이라고 비판했다. 입장은 어떠한가.
A 정부 측근이 아니어서 신경 안썼다. 문화예술 부문 정책을 만들 때 전문분야여서 자문을 요청받을 때가 있다. 이념이나 정당 상관없이 예술인을 위해 어디든 달려가서 자문하는 것이 내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예술인(동료와 선후배)을 위해 미력하나마 최선을 다했다. 비난하고 우려하는 것은 앞으로 일로 증명해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Q 예술인과 복지, 이 두 가지 키워드 자체가 참 어렵다. 그러니 재단의 역할과 사업도 쉽게 풀어내기 어려울 듯 한데.
A 예술인복지재단은 세계에서 우리나라밖에 없다. 재단의 일부 기능을 다른 기관 또는 다른 형태로 이뤄지고 있는 나라도 있지만, 이렇게 재단을 설립한 나라는 우리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가 잘하면, 세계의 모범사례가 될 수 있다. 개념 정리도 필요하다. 재단의 복지는 공짜밥 먹이는 것이 아니다. 사회안전망을 촘촘하게 구축해서 예술인들이 안전망 밖으로 빠져나가지 않게, 힘들지만 창작 활동을 지속할 수 있게, 재능으로 밥 먹고 살 수 있도록 직업 역량을 강화시켜주는, 바로 그것이다. 재단의 복지는 곧 창작, 직업, 사회안전망 이 세 가지 키워드로 정리할 수 있다.
Q 예술인만을 위한 복지에 불만을 갖는 국민이 있다. 왜, 예술인들을 위한 이같은 복지가 필요한가.
A 복지는 참 어려운 얘기다. 세금을 갖고 하는 것인 만큼 국민적 합의가 필수다. 노인과 장애인에 대한 복지는 이미 사회적 합의가 이뤄져 당연히 세금으로 도와줘야한다고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예술인에 대한 복지는 그렇지 않다.
일단 예술인의 역할을 인식해야 한다. 예술인은 사회에 가치를 더하는 일을 한다. 그들은 삶의 질을 높인다. 땀 뻘뻘 흘린 국민이 어느 휴일 공연이나 미술작품 등 예술활동을 보며 위로받고 다시 행복하게 일터로 향하는 것은 예술가의 역할과 가치를 인식한 것이다. 이를 경험한 국민이 자발적으로 예술인의 지속적인 창작활동을 돕고 싶은 마음이 드는, 그런 인식 개선과 사회적 합의가 무엇보다 우선이다.
예술인을 도와야 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예를 들어 제조업은 기술을 개발하고 연구해 생산단가를 낮춘다. 마진이 많이 생기면서 노동자 소득도 커진다. 그런데 문화예술은 자동생산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영화를 제외하곤)복제도 되지 않고, ‘아날로그’에서 벗어날 수 없다. 신기술이 도입된다고 예술가 개인의 소득이 커지는 게 아니다. 이같은 노동환경때문에 예술가들은 지난 시간 상대적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을 수 밖에 없었다.
Q 일반 국민도 그렇지만, 예술인 스스로 ‘복지’에 대한 불편한 시각도 존재한다.
A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예술가들은 항상 춥고 배고팠다. 예술가에게도 문제가 있다. ‘숭고한 예술은 춥고 배고프게 하는 거야’, ‘예술은 아등바등 먹고 살기 위해 하는 것이 아냐’ 등의 인식이 팽배하다. 이런 식의 인식이 유전자처럼 깊이 박혀 수 천년을 살아왔다. 스스로 예술에 대한 돈을 요구하는 것을 정당한 것이 아니라, 마치 사기치는 장사꾼처럼 여기는 경향이 있다. 예술가가 아닌 것처럼 여기는 것이다. 극자본주의화된 현 시점에도 이런 인식이 존재한다. 뻔뻔해져야 한다. 와이셔츠 가게에 가서 ‘3장만 달라’면서 돈 안내는 사람 없다. 예술은 초대권이나 공짜 관람을 당연하게 여기는 사람이 여전히 있다. 이같은 인식을 모두 함께 깨뜨려야 한다.
Q 예술인 복지에 대한 철학과 신념이 확고하게 느껴진다. 한국연극협회 이사장 때 한국연극 100주년 행사에서도 박 대표 특유의 철학을 읽을 수 있었다.
A 잘해도 욕하는 반대편이 항상 있는 법이다. 그래도 당시 100주년 행사는 나름 잘 치렀고 개인적으로도 의미있었다. 당시 지난 100년간 연극계 선배들의 유전자를 향후 100년을 이끌 후배들에게 물려주는 것을 고민했다. 세대갈등과 단절이 심화되는데, 연극계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젊은 연극인들과 지난 100년 한국 연극의 주인공들 무덤을 찾아다니며 대화했다. 맨 땅에 헤딩하며 척박한 연극계를 일군 시대와 선배들의 정신을 설명하고 연결시켰다.
특히 이 일은 지역과 서울간 격차가 큰 상황에 그 칸막이를 제거하고 지역 연극의 균형잡인 발전을 추진하는 것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내가 못 살아서 불만을 갖는 게 아니다. 누군가를 비교하면서 상대적으로 화가 나고 불만이 생긴다. 비교 대상과 소통하면서 나를 인정하는 계기를 만들어, 격차는 줄이고 자존감은 높이는 사업으로 추진했다.
Q 재단에서도 ‘박계배표’ 사업이 기대된다.
A 이번에도 지역 방방곡곡을 다닐 것 같다. 재단이 진행하는 ‘예술인 파견 지원 사업’은 전국에 예술인을 파견하는 것이다. 이 사업이 활성화되면 ‘예술가의 손때가 묻으니 확실히 다르다’는 인식의 계기가 폭넓게 형성될 것으로 본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예술인에 대해 의료비를 지원하는 사업도 있다. 신청하는 사람도 많지만, 뻔뻔하지 못해 여전히 신청하지 않고 힘들게 사는 예술가도 있다. 특히 춥고 배고파야 예술이 된다는 신념 하나로 살아온 원로 예술가들이 그렇다. 그들에게 예의를 갖춰 촘촘한 그물망을 짜야 한다. 이들을 발굴하는 작업을 적극 벌일 것이다.
이처럼 기존 사업이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은 문제다. 대표 없이 1년간 공석이어서 직원들이 피해의식도 있다. 일단 조직을 안정시키고 기존 사업을 활성화시키는 한 해가 될 것 같다. 내후년이면 안정시킨 후 함께 고민한 것을 풀어나갈 수 있으리라 본다.
앞으로 재단이 추진하는 사업의 밑바탕에는 사회에 가치를 더하는 예술가 스스로 뻔뻔해져 노동(예술활동)의 정당한 대가를 받고 이를 지원하는 것에 공감하는 사회적 합의가 이뤄질 수 있도록 ‘인식 개선’이 깔려 있을 것이다.
Q 사회적 합의와 예술인 복지에 대한 인식개선, 쉽지 않은 일이다.
A 모두 내가 해야겠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일은 나눠서 하는 것이 가장 좋다. 전국에 예술인이 있는데 서울 사무실에 앉아서 그 삶을 들여다보고 일할 수 없는 것 아닌가. 어떤 예술가, 어떤 활동이 가치있는 지 없는 지는 해당 지역 사람들이 더 잘 안다. 지역과 연대해서 일을 나눠 할 것이다. 본부로서의 역할을 명확히 설정하고 지역에 맞춰 분배하고 함께 할 것이다.
Q 조직 개편이 불가피해보인다. 계획은.
A 현장성과 순발력 강한 조직을 구축할 계획이다. 팀제의 장점은 순발력이기 때문에 기존의 팀제는 유지하되, 2개에서 4개팀으로 나누겠다. 4개팀이 10여개 사업을 나눠 하면서 좀 더 현장에서, 현장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조직개편 할 방침이다. 팀간 수평적인 소통이 원활해지면서 순발력이 강화될 것이다.
Q 박 대표는 어떤 리더로 팀들을 이끌 것인가.
A 리더는 손오공처럼 머리카락 하나 훅 불면 여러명이 되듯이, 조직원 모두가 리더처럼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지시하는 리더가 아니라 설득해야 한다. 나는 ‘Why?’만 제공하고, 조직원들이 ‘How to’와 ’What’을 결정해야 한다. 우리는 대부분 조직 진단을 할 때 강점, 약점, 위기, 기회를 분석해 약점을 보충하는 대책을 마련하는데 나는 그것에 반대한다. 강점을 극대화시키는 포지셔닝을 하는 것이 리더가 갖춰야 하는 역량 중 하나다.
류설아기자
사진=추상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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