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4일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2013년 한국 아동 종합실태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아동(18세 미만)들이 주관적으로 평가하는 삶의 만족도는 100점 만점에 61.5점으로 OECD 국가 가운데 최하위를 기록하고 있다. 이 수치를 본다면 우리나라는 아동과 청소년이 행복하지 않은 나라이다.
청소년들의 삶의 만족도를 저해하는 가장 큰 요인이 ‘과도한 학업 스트레스’라고 한다. 우리나라 청소년들은 학교에서 공부를 마친 후 다시 방과 후 학습 활동에 시간을 보내고 있으며, 여가 활동, 곧 친구들과 어울리기, 운동과 취미 활동 등에 보내는 시간이 다른 나라 청소년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다. 여기에 더하여 초중고 학생 77.4%가 입시를 위한 교과목 보충학습에 사교육 기관을 활용하고 있다고 이 실태조사는 밝히고 있다.
정부의 이번 조사는 이 또래의 자녀를 둔 학부모들, 더 나아가 우리 사회의 교육과 문화를 담당하고 있는 기성세대들에게 이제까지 “행복한 삶을 가능하게 해주는 수단”으로써 당연시하던 공부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해준다.
먼저, 이 조사는 학부모들이나 기성세대로 하여금 아동과 청소년들이 왜 공부해야하는지, 무엇을 위해 공부해야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되묻게 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교육은 공부를 통하여 아동과 청소년들이 “선한 사람”이 되고,“ 영리한 사람”으로 성장하게 하는 일을 담당하고 있다.
이 두 목적을 제대로 실현하기 위해서 우리 사회는‘남에게 보이고 과시하기 하기 위한 공부’보다 청소년들이 ‘자기 자신을 위한 공부’에 몰입할 수 있도록 바람직한 교육 환경을 제대로 제공해주고 있는지 반성해보아야 할 것이다.
이어서, 우리는 공부하는 것을 시험 성적과 동일시하고 있지 않았는지 스스로 자문해보아야 할 것이다. 일부 학부모와 기성세대는 청소년들이 학교와 학원에서 시험을 자주 본다는 것을 공부에 매진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성적을 잘 얻는 것을 성공한 교육으로 인정해 왔다.
지난 10월 20일자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미국의 고위 교육 관리들이 시험위주의 교육문화를 개선하기 위하여 미국의 초중고에서 시험 횟수를 줄이겠다는 발표를 전하고 있다. 보도에 의하면 주(州)에 따라 유치원에서 12학년까지 미국의 초중고생들은 평균 113회 정도의 시험을 치르는데 일부 교육자들은 ‘시험 때문에 엄청난 양의 교육시간이 없어진다.’고 하면서 시험 없이도 학생들의 성장과 발전을 평가할 수 있는 전문가가 교사라는 믿음을 사람들이 공유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 청소년들이 유치원에서 초중고까지 보는 시험횟수는 아마 미국의 그것에 비해 훨씬 더 많고 다양할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시험을 줄이자는 논의나 제안은 일부 사람들에게 교육자들이 교육을 게을리 하거나 포기하는 것으로 비춰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과도한 시험, 지나친 성적 위주의 학교 교육은 아동과 청소년들의 건강한 미래를 담보하기보다는 그들로 하여금 불안감이나 생활 속에서 패배의식을 더욱 더 심화시킬 지도 모른다.
우리나라 청소년 가운데 대학에 입학한 많은 학생들이 대학 진학 후, 자신의 미래에 대해 다시 방황하고 좌절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한 것은 초중고까지 우리의 교육이 오로지 시험 성적의 향상과 대학 합격을 목표로 했을 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자신이 진정 원하는 삶이 어떤 삶인지에 대한 실존적 물음을 공부하는 시기에 외면해 왔기 때문이다.
여전히 기성세대가 공부가 곧 시험이고, 교육의 성패는 입시를 통해 좌우된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다산 정약용(1762-1836) 선생이 자기 시대의 학문과 교육의 경향을 비판하면서 “지금 천하의 총명하고 슬기로운 재능이 있는 이들을 모아 일률적으로 모두 과거(科擧)라고 하는 격식에 집어넣고는 본인의 개성은 아랑곳없이 마구 짓이기고 있으니, 어찌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있겠는가”라고 하는 탄식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어른들은 현재 아동과 청소년들이 겪고 있는 과도한 학업 스트레스를 단지 그들이 알아서 극복하고 스스로 해결해야하는 성장통(成長痛) 정도로 여기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우리사회에서 청소년은 인구의 20% 정도에 불과하지만 이들이 곧 우리나라의 장래를 이끌어갈 미래 세대의 주역이라는 점을 기성세대는 명심해야할 것이다.
고대혁 경인교육대학교 윤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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