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참전 유공자군포지회장 하병열씨
“조국과 민족을 지키기 위해 청춘을 전쟁터에 바쳤지만, 고령의 참전용사가 된 지금 서럽고 힘들때가 많습니다.”
스무 살 꽃다운 나이에 하사관으로 지원, 6·25전쟁의 참혹함을 온몸으로 견뎌낸 하병열씨(대한민국 625참전 유공자군포시지회장·85)의 조국사랑은 남다르다.
최근 군포시 브리핑룸을 찾은 하 회장은 6·25전쟁 당시 수류탄 파편이 박힌 왼쪽 옆구리 상처 때문에 의자에 앉아 기자회견을 하겠다며 기자단에 양해를 구했다. 하 회장은 치료차 군포시에서 다니는 보훈위탁병원의 진료과목이 너무 부족해 지정병원을 변경해 달라는 하소연을 하기 위해 6·25 참전동지와 함께 기자실을 찾았다.
경남통영이 고향인 하 회장은 1950년 전쟁이 발발하자 육군 하사로 지원해 3사단 23연대 3대대 12중대에 배치받았다.
하 회장이 치른 전투는 셀 수 없을 만큼 이어졌다. 인민군 주력부대의 첫 남쪽 진출지였던 동부전선의 울진 메아리 전투를 시작으로, 속초를 거쳐 중부전선의 양구 가칠봉 전투, 철원 감화전투, 동부전선의 연천 노리고지 전투 등. 생사를 넘나드는 전쟁의 한복판에서 북한 인민군이 던진 수류탄 파편에 왼쪽 옆구리에 큰 부상을 입은 하 회장.
이로 인해 아직도 고통 받고 있다는 하 회장은 “당시 지게부대(현 물품지원부대 격)가 아군이 있는 고지까지 총알과 식량, 물 등을 공급하지 못하면 3일간 굶으면서 탄알을 아껴가며 전투를 벌이곤 했다”며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인간 이하의 생활을 견뎌 조국을 지켰다”며 목이 메었다.
하 회장의 가슴을 빛내는 충무공훈장과 화랑무공훈장은 청춘을 국가에 바쳤다는 자랑스러운 증표다.
하지만, 용맹함과 애국심으로 똘똘 뭉친 젊은 청년도 고령의 참전용사가 되자 전쟁의 상흔을 몸에 지닌 노인이 됐다. 이 때문에 제대로 된 치료를 받도록 국가차원의 복지서비스가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 하 회장을 비롯한 참전용사 대부분의 열망이다.
하 회장은 “지금 다니는 남천병원에는 저같이 고령의 참전용사를 위한 진료과목이 턱없이 부족하다”라며 “올 초부터 수원보훈지청을 찾아 애원도 하고 탄원서도 제출해 봤지만, 법적인 얘기와 예산문제만 들먹이면서 해결해주려는 의지조차 없어 서운함이 극에 달했다”고 하소연했다.
하 회장은 “타지역은 보훈위탁지정병원을 변경해준 사례도 있었다”며 “억지를 부리는 것도 아니고 조국을 위해 나라를 지킨 참전병의 최소한의 편의를 보아 달라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일인지 몰랐다”며 훈장을 말없이 쓰다듬으며 탄식했다.
끝으로 하 회장은 “앞으로 얼마를 살지 모르는데 진료를 효과적으로 받도록 해달라는 것이 정말 무리인지 다시 한번 되묻고싶다”며 강하게 호소했다.
군포=김성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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