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전 햇병아리 시절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겁도 없이 ‘나의 다론(茶論)’을 발표하기도 했다. 차는 자신하고의 만남 나아가 우주와 내가 하나 됨 등을 피력했다. 이때를 떠올리면 지금도 얼굴이 붉어진다. 차와의 본격적인 만남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몸담게 되면서부터다. 간송미술관에서는 1971년 가을부터 봄과 가을에 2주일씩 1년에 두 차례씩 특별전이 열린다. 이를 보기 위해서나 유물대여를 위해 이곳을 찾았다.
보화각 2층 연구실에선 가헌 최완수 선생은 직접 차를 우려서 건넨다. 내년이면 이곳에 몸담은 지 50년이 되는 최 선생을 처음 뵐 때 직접 차를 준비하던 모습은 지금도 선명하며 뇌리에서 지워지질 않는다. 같은 정경은 오늘도 마찬가지이다. 내 자신 차 그림에 대한 관심은 여기서 비롯했으니 그 동안 조사하고 감상한 조선시대 차 그림은 300점을 웃돈다.
아울러, 일본인 학자들이 국립중앙박물관 방문 시 관장께 선물로 가져온 고급 녹차들은 세밑이면 재고정리 차원에서 내 몫이 되었다.
녹차는 묵으면 향과 맛이 크게 떨어지나 다시 덖으면 맛이 어느 정도는 회복됨도 일찍 알았다. 일본에 공무출장 중 사찰에서 조우한 말차(沫茶)에 대한 기억도 새롭다. 2005년 일본 교토에서 열렸던 차연(初風爐の茶事) 등 차 모임에도 몇 차례 참석했다. 중국 절강성에 위치한 차 박물관을 방문할 기회가 주어졌다.
국내 지인들이 손수 덖은 차를 보내주어 끊이지 않아 차복(茶福)까지 타고 났음을 절감한다. 매년 어김없이 새 차를 보내준 박동춘 선생은 우리 박물관에서 지난달 말일 조용히 개막한 ‘차, 즐거움을 마시다’ (4.30∼8.24) 특별전 자문과 함께 옥고(玉稿)까지 주셨다.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이 특별전은 우리나라 전통 차 문화 전체를 조명한 전시이다. 같은 주제로 지금까지 국내에서 개최한 비중 있는 전시로는 31년 전 숭례원 주최로 한국방송공사에서 열렸던 ‘한국전통차문화자료전’(1983.5.3∼5.22)과 12년 전 광주비엔날레 전시의 일환으로 의재미술관에서 연 ‘다향(茶香) 속에 어린 삶과 예술’(2002.3.29 ∼6.29)을 들게 된다.
이들과 비교할 때 이번 경기도박물관 전시는 질과 양 모두에서 단연 돋보인다. 이는 그간 차 문화전반에 대한 다방면에 걸친 학계의 연구에 힘입은 바 크며, 이세 전시 기획에 모두 참여한 자신을 되돌아보면 격세지감과 더불어 감개무량으로 가슴이 뭉클하다.
출품작 중 그림은 보물로 지정된 ‘16나한’과 ‘독성탱’ 등 불화, 우리나라 차 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한 정약용· 김정희·초의의 초상, 조선시대 각시기를 대표하는 화가들의 명화들로 먼저 조선중기 화단을 연 문인화가 이경윤과 화원 이흥효, 조선후기는 윤덕희·심사정·이인상 등 쟁쟁한 문인화가와 활동이 두드러진 직업화가인 김두량·김홍도·이인문·이명기·이재관·이방운·이한철을 비롯해 말기의 허련등의 명품이 망라되었다. 인류에 있어 차의 역사는 오래다. 단순한 기호식품의 영역을 넘어 문화사적인 측면서도 의미가 지대하다.
물이 좋지 않은 곳에서 맥주가 크게 발전했다. 한편 아시아 각국에서 차는 생리적인 갈증해결이란 일차적인 기능에 그치지 않는다. 불교와 도교 나아가 유교에 이르기까지 정신을 맑게 하고 졸음을 물리치는 등 수행과정 및 신불(神佛)께 올리는 헌다(獻茶)등 여러 의식에도 포함된다. 로마와 그리스는 인간의 몸을 빌려 신을 표현했지만, 동아시아는 차와 향을 통해 그윽하고 유현한 신의 경지를 넘나 들었다.
이원복 경기도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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