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 목마름으로 사선 넘어온 북한이탈주민들의 ‘깊은 상처’
이들은 우리 사회에서 어떤 삶을 살아갈까? 하나원에서 출소한 뒤 우리나라의 갑남을녀로 섞이기까지는 또다른 장벽이 존재한다. 주위의 시선, 자본주의 이면에 숨겨진 또다른 차별, 이로 인한 경제적인 궁핍…. 전혀 다른 이데올로기 속에서 살아온 이들이 국내에 정착하기까진 또다른 난관이 도사리고 있다. 이들의 절절한 이야기를 무대에 올리겠다고 나선 이가 있다. 바로 고선웅 경기도립극단 예술단장이다. 그가 기획·연출한 연극 ‘날숨의 시간’은 극단 단원의 연기와 대사를 통해 북한이탈주민의 애환을 대변한다.
지난 8일 오후 3시 경기도문화의전당 극단 연습실에서 만난 고 감독은 ‘날숨의 시간’ 초연을 위해 각 배우들의 연기를 지도하느라 분주한 모습이었다. 연습실 한가운데 설치된 가상무대는 덧마루가 곳곳에 겹겹이 쌓여 입체감을 주고 있었고, 배우들은 각자가 북한이탈주민으로 분해 연기에 몰입하고 있었다. 고 감독은 주인공을 맡은 배우들의 표정 하나부터 대사를 읊는 말투, 심지어 동선과 도는 방향까지 세심하게 지도하며 배우들과 함께 무대에 몰입하고 있었다.
치열한 연습은 후반부로 접어들면서 감정의 깊이를 더해가더니, 연습이 끝나서도 그 감정의 여운은 계속되는 듯 했다. 고 감독도 끝내 배우들과 함께 눈물을 터뜨렸고, 일부는 꺼억꺼억 소리를 내며 통곡했다. 그렇게 눈물로 하나가 된 이들은 둥글게 모여서는 “내가 있어 우리가 있고, 우리가 있어 내가 있습니다. 나와 우리는 행복하다. 하나둘셋, 수고하셨습니다”하는 구호와 함께 연습을 마무리했다.
연습을 마친 뒤 눈물을 훔치는 고 감독에게 물었다. “어떤 내용이길래 이렇듯 감정이 복받치는 모습인가요?”
그가 이렇게 되받았다. “극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북한에서 나고 자란 미영·미선 자매에게는 꿈이 있어요. 북한에서는 그 꿈을 이룰 수 없다는 걸 깨달은 이들은 탈북을 해서 자유를 찾아 우리나라로 오거든요. 하지만 자기들이 꿈을 이루기에는 우리나라도 세상이 너무 험하죠. 결국 변종업소에 취직해 화류계에 몸담게 된 이들은 몸이 닳고 닳아서 한숨 속에 꿈이 좌절되죠.”
꿈을 이루기 위해 자유를 찾아 사선을 넘어 우리나라에 들어온 이들이 결국에 현실의 벽에 부딪쳐 꿈을 이루지 못하는 상황은 너무도 역설적이다. 우리 사회가 이들을 따뜻하게 껴안아주지 않은데 따른 반대급부는 너무도 처절하다.
“호흡에는 들숨과 날숨이 있어요. 한국사회는 숨을 계속 뱉어내는 일만 해왔습니다. 북한이탈주민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이후 뱉은 한숨, 우리 사회가 이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뱉어놓은 날숨의 기나긴 시간은 종국엔 우리 사회를 질식시키고 말 겁니다. 그래서 날숨의 시간이란 제목이 탄생하게 됐죠”고 감독은 연극 제목이 탄생하게 된 배경을 이같이 설명했다.
사실, ‘날숨의 시간’이란 제목은 극본을 쓴 박찬규 작가의 아이디어로 탄생했다. 고 감독이 당초 연극을 기획할 당시의 제목은 ‘짐승’이었다고 한다.
고 감독은 “경기도내 배려계층에 대한 문화사업에 참여하면서 북한이탈주민들을 만날 기회가 몇번 있었는데, 이들의 대부분은 ‘난 짐승처럼 살았다’고 얘기한다. 사람이 짐승처럼 살았다는 것 만큼 가슴아픈 얘기가 있을까”하고 반문하며 “사람답게 살지 못하고 짐승처럼 살아온 이들의 입장을 누군가는 대변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물론 세상에 안타까운 사연은 많다. 짐승처럼 살아온 사람이 비단 북한이탈주민 뿐일까? 굳이 탈북이란 이슈를 조명하게 된 계기가 궁금해졌다.
고 감독이 기자에게 북한이탈주민의 애환을 담은 작품을 구상하고 있다고 귀띔했던 건 지난해 11월이다. 평소 이들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킨, 보다 구체적인 계기가 있을 것이란 의문이 들었다.
“작품을 구상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있을 것 같은데요?(기자)” “지난해 초 ‘14호 수용소 탈출’이란 책을 읽었어요. 워싱턴포스트 기자 출신인 작가 블레인 하든이 쓴 작품을 한역(韓譯)한 책인데, 신동혁이란 실제인물이 등장하죠. 북한의 악명높은 교화시설인 14호 수용소에서 나고 자란 사람인데, 그는 어렸을 때부터 그곳을 벗어나기까지 ‘사랑’ ‘노래’란 단어를 모르고 자랐다더군요. 사랑이 뭔지, 노래가 뭔지 모른다? 그 대목을 읽으면서 엄청난 충격을 받았어요. 사랑은 사람과 사람 사이 가장 기본적인 감정이잖아요. 우리와 지근거리에 있는 저 곳은 정말로 판이한 세상이란 생각이 관심을 부추겼죠.”
그는 작품기획 초기 취재 과정에서 만난 한 북한 출신 청소년에 대한 이야기도 들려줬다. “14살이었어요. 우리나라에서는 중학생 나이인데 몸무게가 25㎏래요. 제 아들도 8살인데 한 20㎏은 거뜬히 나가거든요. 그렇게 왜소한 체구로 어떻게 탈북을 했는지 물었더니 ‘산을 몇개 타 넘었다’고 하더라고요. 제대로 먹은 것도 없이 하룻밤 사이에 산을 몇개 넘었다? 정말 충격적이었어요.” 중학교를 다니는 딸이 있고, 이제 초등학교에 막 입학한 아들이 있는 아버지이기도 한 고 감독에게는 이 탈북 청소년의 고충이 남 일같이 느껴지지 않았을 터다.
작품의 기획과정에 대한 얘기를 구체적으로 들어봤다. 지난해 11월쯤 극본 집필 의뢰를 시작으로 각 배우들에게 역할이 주어지고 본격적으로 호흡을 맞추기까지 모든 스텝과 배우들에게도 북한이탈주민들과 동화되기 위한 과정이었다. 고 감독은 다큐멘터리 영상을 찾아보고, 북한이탈주민과의 인터뷰 녹취를 들어보면서 연극의 모든 주체가 서서히 북한이탈주민의 애환을 통감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이건 꼭 얘기를 해야한다는 생각은 점점 명확해졌어요. 다큐멘터리 속에 생생히 드러난 탈북 현장에는 정말 놀라운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죠. 정말이지 우리가 모르는 게 너무 많았어요. 탈북과정이란게 으레 중국에 갔다 한국에 들어오는 것이라고 단순하게 알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죠. 국경을 3~4개 넘으면서 밀림을 헤쳐나가는 이들의 모습 속에서 자유에 대한 목마름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 깊이 고민했죠. 그래서 극중에서도 초반에는 사선을 넘는 과정을 거의 적나라하게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어요. 그래서 관객들이 ‘이 사람들이 진짜 산을 넘고 물 건너, 바다 건너서 오는구나’ 하고 피부로 느낄 수 있도록 탈북하는 과정을 거의 대사 없이 30~40분 동안 보여줘요. 탈북 과정을 물리적으로 하는 장면인데, 이게 관객에게도 인상적일 겁니다.”
고 감독의 작품 스타일을 보면 무거운 사회적 이슈를 다루면서도 그 속에서 해학미를 끌어내는 즐거움이 있다. 사회 고령화 문제를 다룬 ‘늙어가는 기술’과 사회 전반의 정신질환을 한 무대에서 표현한 ‘걱정된다 이가족’에도 여지없이 관객의 웃음을 터뜨려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탈북이란 소재에서 웃음의 포인트를 찾는다는 게 그렇게 쉽지 않아보였다.
이같은 기자의 우려를 뒤집듯 그는 “그래도 풀 것(?)은 푼다. 계속 안타깝고 슬프기만 하면 무거워서 어떻게 보나. 연극이니까 어찌됐든 이화시켰다, 동화시켰다 하면서 간다. 오락적인 부분도 있고, 천천히 잽, 스트레이트, 훅을 날릴 것”이라고 말했다.
무대 연출에 대해서도 그는 “날 것 같은 느낌을 주기 위해 노력했다”며 “관객들이 배우들의 숨소리는 물론 피부에 흐르는 땀까지 볼 수 있도록 행복한 대극장의 무대 위에 관객석을 설치해 연극을 보여줄 것”이라고 말했다. 통상 연극을 상연해왔던 아늑한소극장보다 무대와 객석의 간격을 더욱 가깝게 좁히기 위한 설정이다.
인터뷰 내내 고 감독은 북한이탈주민들의 이야기를 무대에 올리는 데 대한 부담감을 내비쳤다. 그들의 이야기가 너무 적나라하게 드러나 그들의 마음을 무겁게 할까봐 준비과정 내내 ‘줄타기’를 했다는 그의 말에서 지난 수개월간의 부담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인터뷰 말미에 이같은 말을 남겼다. “작품이 탈북자들에게 위로가 될지는 모르겠어요. 오히려 무거운 마음을 줄까봐 걱정이죠. 하지만 이들을 바라보는 우리들의 시각은 많이 좋아지지 않을까 생각해요. 탈북자들의 입장을 많이 이해하고 배려한다고 했지만, 단지 관객들이 보시고 이렇게 느꼈으면 좋겠어요. ‘이런 사람도 있구나’ 하는 걸 말이죠. 이렇게 힘들게 왔는데도, 우리 사회 속에서 아파하는 사람들이 있구나 하고 느낀다면 그걸로 족합니다.”
경기도립극단의 연극 ‘날숨의 시간(극본 박찬규·연출 고선웅)’은 오는 18~20일 총 4회에 걸쳐 경기도문화의전당 행복한대극장에서 관객을 만난다. 전석 3만원 문의 (031)230-3301~4
박성훈기자 pshoon@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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