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람에서 무덤까지 종합 라이프서비스
“단순히 상(喪)을 치르는 서비스에 국한하지 않습니다. 상조회사에 가입한 회원들이 ‘요람부터 무덤까지’ 만족하는 종합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만드는 데 올인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상조시장의 성장과 발전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고 있는 최철홍 보람그룹 회장의 꿈은 아직 성장형이다.
과거 ‘장의사’, ‘염사’ 등으로 불리며 사회에서 평가절하됐던 장례업계 종사자의 입지를 전문화된 교육과 조직구성을 통해 한층 끌어올린 최 회장은 보람상조를 상조 업계에서 부동의 1위로 자리잡게 했다.
보람상조의 시스템을 차용하지 않은 업체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회사를 견고하게 만든 최 회장은 “조금 생뚱맞게 들릴지 모르지만 ‘장의도 단골 장사’더라”고 입을 열었다.
■ 잘나가던 청년사업가의 좌절 그리고 ‘상조와의 인연’
최 회장이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업종은 보험회사이다.
이 회사에서 2년 반동안 영업을 배웠던 그는 24살에 사업을 시작했다.
최 회장은 “사업이 나름대로 자리를 잡아가며 청년사업가로 20대를 살았지만 29살에 사업이 무너지며 모든 것을 잃었다”며 “더욱 큰 문제는 심한 우울증을 앓게 됐고, 결국 수차례 자살 시도까지 이어졌다”고 말했다.
그러던 중 ‘죽는 것은 네 마음이지만 네가 죽으면 나와 네 어머니까지 같이 죽겠다’는 어버지의 결연함을 접하며, 최 회장은 ‘이미 나는 죽은 몸인데 부모님이 살아계신 동안 그분들에게 효도하며 살자’라며 잠시 죽음을 뒤로하기로 마음을 돌렸다.
최 회장은 “그 과정에서 30년간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온 나 자신을 돌아볼 수 있게 됐다”며 “또한 모든 것을 놓아버렸기 때문에 삶과 죽음이라는 부분에 대해 자연스럽게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며 고 덧붙였다.
그 이후 최 회장의 인생은 바뀌기 시작했다.
이미 한번 죽은 몸인데 못할 게 없더라던 최 회장은 할 수 있는 일을 찾기 위해 당시 직업군으로 나눠진 전화번호부를 뒤지는 등으로 고민을 시작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남들도 하고 싶을 것이고, 내가 하기 싫은 것은 남들도 하기 싫을 것’이라고 생각한 최 회장은 위생회사에 취직을 시도했다.
말이 위생회사 직원이지 과거 가가호호를 방문하며 ‘똥 퍼’라고 외치던 직업이다.
그러나 이마저 쉽지 않았다. 이 직업도 의외로 쌈짓돈이 생기는 직업이어서인지 150만원의 몫돈을 지급해야 시작할 수 있었던 것. 돈이 없던 최 회장은 결국 포기해야 했다.
이후 보험회사를 다니며 알았던 보험아줌마들을 통해 상조회사에 영업에 대한 강의를 시작한 것을 계기로 상조회사의 영업부장까지 올라갔지만, 86년도에 영업방식을 놓고 회사 대표와 다툼을 벌이다 일자리를 잃게 됐다.
1987년 개인 장의업으로 새롭게 시작한 최 회장은 본격적인 상조인의 삶을 시작한다.
최 회장이 자리를 잡게 된 계기는 상가집에서 조문객들이 치던 화투를 보다가 ‘화투의 10을 보고 장이야’라고 외치던 소리를 듣고 전화번호에 대한 힌트를 얻게되며 시작됐다.
최 회장은 “이삿짐센터는 2424 등 상징할 수 있는 번호가 있듯이, 장의사는 1024라는 번호를 사용하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당시 부산에는 98개의 국번호가 있었는데 이 중 30개 가량의 1024 번호를 샀다”고 말했다.
보람상조 창업 그리고 ‘승승장구’
1987년 상조인의 삶 시작… 1991년 ‘창업 도전장’
입소문 통해 조문객이 고객으로 ‘선순환 체계’ 구축
장례업 인식 개선 ‘1등 공신’
사랑하는 가족과 품격있는 ‘아름다운 이별’ 도우미
끊임없는 상품개발… 회갑ㆍ돌잔치까지 영역 확대
상조업, 여전히 갈길 멀다
선수금 미예치 부실 군소 상조사 ‘불법 업체’로 전락
고객과 업계 공생ㆍ발전위해 조속히 협회 출범 필요
이후 신문에 광고를 내는 등의 홍보를 통해 최 회장의 장의업은 승승장구해 부산 여러지역에 분점을 내게 됐고, 병원 장례식장 사업까지 영역을 확대하다가 1991년 보람상조를 창업했다.
그는 “상가를 찾았던 조문객들이 상들 당했을 때 새로운 고객이 되는 등 입소문을 통한 영업 효과는 최고엿다”며 “최근까지 현장의 목소리를 중요하게 여기는 기업문화는 이때 만들어졌다”고 말했다.
■ 장의업 편견을 깨는 일대 혁신… ‘상조문화’ 새장 개척
그는 상조란 말에 대한 설명부터 시작했다. 상조란 “서로 상(相) 도울 조(助)를 쓰는 상부상조(相扶相助)의 준말로 서로 돕는다는 뜻이다고 설명했다.
예부터 우리나라는 두레, 품앗이 등 서로 돕는 문화가 있었지만 현대의 핵가족화 시대에는 이런 의미가 많이 퇴색되었다. 그 역할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상조회사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처음 상을 당하면 이에 대한 정확한 절차는 어떻게 진행되는 지, 비용이 얼마나 드는지에 대한 정보와 지식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는 “과거에는 장의사가 고인에게 염을 하고 입관을 하며 초상까지 치르는 게 대부분이었지만, 상조회사는 장례의 전문가가 기획하고 컨설팅해 돌아가신 어른에 대한 예를 다할 수 있게 된다”고 말했다.
또한 생전의 히스토리가 담겨있는 사진 등을 통해 고인의 인생을 돌아볼 수 있는 인터넷 추모관까지 만들었으며, 과거에는 비디오를 찍어가며 고인을 기억할 수 있는 시스템을 적용하기도 했다.
최 회장은 “‘고객 중심의 서비스’, ‘새로운 고품질 서비스 개발’에 아직도 매진하고 있다”며 “초창기 기존 장의업의 관행을 개혁하는 일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신념과 사명의식을 지킨 결과 상조업이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됐다”고 강조했다.
그는 “상조회사는 일본에서 들여온 것이지만, 단순히 기업문화를 받아들이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며 “끊임없는 상품개발 등을 통해 회갑, 칠순, 돌잔치 등에 대한 행사도 함께 진행하는 상품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이같은 상품은 일본의 오오사카 등에서 역으로 벤치마킹해 일본에서도 상품으로 자리잡는 등으로 한국의 자존심을 되찾았다”고 덧붙였다
그는 “레저, 호텔분야 등과 접목한 서비스 향상에 신경을 쓰며 신상품 개발이 진행 중으로 내년에는 접할 수 있을 것”이라며 “장례상품을 넘어 웨딩, 축연, 여행 상품 등 다양한 상품을 통해 요람에서 무덤까지를 책임지는 기업으로 거듭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와함께 최 회장은 상조문화 전파의 일환으로 2012년부터 사회봉사 활동에도 참여하고 있다.
NGO단체 굿피플과 함께하는 콩팥사랑 캠페인과 사회봉사단 발족을 통해 다양한 봉사활동까지 병행하고 있는 최 회장은 어려운 이웃에게 사랑과 도움의 손길까지 전하고 있다.
■ 상조업체 ‘우후죽순’… 고객 울리는 부실업체 대책 필요
전국 약 300여 개의 상조회사가 운영되고 있는 가운데 상조회사의 건전성을 높이기 위해 지난 2010년부터 공정거래위원회에서 고객들의 선수금을 단계적으로 50%까지 예치하도록 하고 있다.
또한 상조 회원들이 공제조합에 접속하면 모든 사실이 확인될 수 있도록 시스템이 구축됐다.
이에 발맞춰 보람상조를 비롯한 많은 상조 업체들이 과거의 악습을 타파하고, 새로운 상품 개발 노력 등을 기울이며 재무구조를 개선시키는 등 긍정적인 성과가 나오고 있다.
그러나 군소업체들에 대한 관리는 사각지대에 놓인 게 현실이라는 것이 그의 설명.
실제 지난해에만 70여 개의 상조회사가 고객 선수금 예치에 실패 하는 등의 문제를 양산했고, 경영이 어려운 회사들은 사업을 정리하지 못해 선수금 미예치 불법 업체로 전락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같은 부실한 상조회사에 대한 문제는 해결되야 한다는 것이 최 회장의 소신이다.
그 방안의 하나로 좀 더 큰 회사에서 M&A를 하는 방법이 있지만, 현행 제도에서는 인수당할 업체의 회원 모두의 동의를 얻어야하기 때문에 사실상 불가능한 제도여서 이를 보완하는 제도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를 위해 상조회사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협회를 통해 상조 업종을 발전 시켜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그는 지적했다.
아직까지 국내 상조업계에는 공정위의 인가를 받은 사업자 단체(협회)조차 없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최 회장은 “정부의 정책과 함께 상조업체들도 자구책을 강구해야 한다는 것에는 상조인들이 공감하고 있다”며 “협회가 만들어질 필요성에는 다들 공감하는 만큼 조속히 상조업체들의 입장을 대변할 수 있는 협회가 만들어져야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명관기자 mklee@kyeonggi.com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