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카페] 문인화가 경기관찰사, 윤의립과 홍수주

오늘날 도지사인 도백(道伯), 즉 조선시대 관찰사의 임기는 매우 짧았다. 조선시대 경기도는 600명에 가까운 도지사를 배출했는데, 2회와 3회 나아가 4회까지 임명된 이들도 있다. 이들 중에는 정사·개국·원종 등 공신들과 천문·지리·수학·역학·의약에 정통했거나 아악을 정리한 이들도 있다.

청렴과 근신 및 효자로 이름을 얻었거나 명필들 그리고 학문과 문장에 능해 저술을 남겼거나, 드물지만 그림으로 이름을 얻은 문인화가들도 있다. 조선중기 화단에서 대표적인 문인화가로 손꼽히는 17세기 전반의 윤의립(1568~1643)과 후반의 홍수주(1642~1704)는 각기 몰년과 타계 전해인 1643년과 1703년 경기도 관찰사를 지냈다.

일반적으로 전통사회에 그림을 홀대한 것으로 간주되기 쉬우나 실상은 이와 다르다. 중국 최초의 미술사서로 지칭되는 ‘역대명화기’를 지은 당나라 장언원은 일찍이 그림의 공은 6경(經)과 같다고 힘주어 말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그림은 교화를 이루며 인륜을 돕고 신묘한 조화를 탐구하며 그윽하고 미묘한 것을 헤아리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어진 임금으로 지칭되는 세종·숙종·영조·정조 등은 그림 감상만이 아닌 직접 붓을 들어 사군자를 치는 등 그림 그리기를 즐겼다. 한자문화권의 문인화가의 존재가 말해주듯 위로는 서화를 즐긴 관료 및 선비가 한둘이 아니다. 다만 조선왕조는 신분사회로 제도권 내에서 활동한 화원 등 그림이 본업인 화가들의 신분이 양반 아닌 중인이기에 이에서 비롯된 폄훼일 뿐이다.

조선중기를 대표하는 문인화가인 윤의립은 그의 조부가 선조의 어린 시절 사부였고, 부친이 공조판서를 역임한 명문가의 후예이다. 그 또한 27세에 문과급제 후 공조·예조판서를 역임하는 등 50년 가까이 관직에 있었다. 경기도에 앞서 경상도·함경도·충청도 관찰사를 거쳤다.

유작으로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6폭의 ‘산수화첩’은 네 계절을 여덟 폭에 담은 원래 8폭의 사시팔경도 계열이었으나, 2폭이 산락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끝 폭인 겨울 장면엔 그의 호 월담(月潭)이 들어간 붉은 먹으로 쓴 행서체 관서가 있다. 소품의 정형산수로 크기와는 별개로 특징 있는 계절의 표현, 화면 구성과 세부 묘사에서 녹녹하지 않은 기량과 격조를 읽게 된다.

그의 아우 윤정립(1571~1627) 또한 조선후기 대 수장가인 김광국이 모은 화첩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화원별집’ 내에 ‘폭포 아래서 피서(瀑下避暑圖)’와 개인소장의 ‘관폭도’와 ‘행선도’ 쌍폭 등 3점이 알려져 있다. ‘관폭도’에는 폭포를 바라보는 두 노인 주변에서 시중드는 세 동자가 등장하며, 이 중 한명은 차를 준비하고 있어 시선을 모은다. 윤의립·정립과 형제가 함께 화가로서 명성을 얻었다.

홍수주는 청신하고 기발한 근체시로 동시대 시단에서도 높게 평가되었다. 그는 묵매와 묵죽 특히 함께 황집중과 이계호에 이어 묵포도로 대단한 명성을 얻었다. 다소 늦은 나이인 41세에 과거에 급제했으나 2년 뒤 파직된다. 김정희가 그러하듯 43세부터 10년에 이르는 유배생활 겪어야 했으니 이 시기는 학문과 서화에 잠심한 참으로 값지고 의미 있는 시절로 사료된다.

귀양서 풀린 뒤 타계 까지 10년은 사신으로 연경에 다녀오고 동부승지로 원접사로 청 사신을 맞이했고 예조참의, 경기도 관찰사, 도승지, 형조참판에 이르렀다. 청빈한 삶을 산 홍수주는 회갑 때 가난하여 변변한 옷조차 마련할 수 없었다. 어린 딸은 남의 옷을 빌려 입었는데 그만 치마에 간장물이 튀자 치마폭에 묵포도를 그려 중국 북경에서 비싼 가격에 판 일화도 전한다.

유작도 여러 점 알려져 있으며 포도 대련 중 한 폭은 잎뿐 포도송이를 그리지 못한 미완성인 채로 유작이 된 것이 있었다. 그의 둘째 아들 홍우열은 어릴 때 부친이 타계해 직접 그림수업을 받을 기회가 없었는데 물려받은 천재성으로 부친의 포도 그림을 완성했으니 그야말로 부전자전이 아닐 수 없다.

이원복 경기도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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