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대왕의 죽음과 함께 시작된 19세기는 부패의 극을 이루던 시기였다. 대왕의 개혁정치는 물 건너가고 모든 것은 옛날로 돌려졌다. 아니 부정은 과거보다 더욱 극심해졌고 정통성을 잃은 왕권은 미약하기 짝이 없었다. 누구도 어린 백성들을 돌보지 않았다.
거기에 믿었던 중국이 서양에 패배하니 세계관마저 무너져 백성들은 어디로 가야할지를 모르고 있었다. 그때 경주사람 수운 최제우에 의해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동학이 창도됐다. 동학의 평등주의적 사상은 신분적 차별과 억압 하에 있던 백성들에게 주효해 너도나도 동학에 입도했다. 당시 주자학 이외의 학문에 엄벌을 가하던 조정은 최제우를 참수했지만 그의 제자인 해월 최시형의 지도하에 동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나갔다.
부패세력들의 폭정이 극에 달한 곳이 곡창지대인 전라도 땅이었다. 삼정의 문란은 말할 것도 없이 온갖 잡세를 부쳐 또 뜯고 또 뜯어 갔다. 먼저 1894년 갑오년 1월 10일 전라도 고부의 말목장터에서 봉기한 농민군은 고부군수 조병갑을 징치하러 관아로 달려갔지만 그는 이미 도망간 뒤였다.
지도자였던 고부접주 전봉준은 창고문을 열고 수탈한 곡식을 나누어 준 뒤 이웃한 무장으로 가서 손화중을 만났다. 손화중은 호남 최대의 동학조직을 이끄는 대접주였다.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호남지역의 동학군에게 통문해서 백산에 모이게 했다.
전북 부안의 백산에 모인 수만의 동학군들의 손에는 죽창이 들려 있었다. 그래서 나온 말이 앉으면 죽산 서면 백산이다. 파죽지세로 탐관오리들을 처단하며 전주성까지 점령한 동학군에 놀란 조정은 청나라와 일본에 원군을 요청했다. 제나라 문제 해결에 외국군을 불러야 할 정도로 무능한 정부였다. 동학군의 지도부는 정세를 파악해 개혁적 요구조건을 걸고 전주화약을 맺어 철수해 최초의 지방자치제였던 집강소 활동에 들어갔다.
그러나 청일전쟁에 승리한 일본군은 갑오개혁을 추진하자 다시금 동학군들이 일어났다. 2차 봉기였다. 특히 9월 18일 해월 최시형의 총기포령으로 동학군은 전라도 지역을 넘어서 전국에서 동시에 똑같은 구호를 가지고 일어났다.
보국안민과 척왜양창의의 구호는 내 나라를 내 힘으로 지키자는 민족적 각성이었고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보자는 인간주의적 몸부림이었다. 비록 그들의 외침은 공주 우금치에서 패퇴함으로 종결되고 말았지만 오늘 우리는 그들의 행위를 혁명이라고, 아니 아직 끝나지 않은 혁명이라고 부른다.
동학혁명이 추구했던 이상사회는 모든 사람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사는 세상이었다. 그 세상은 지금의 기형적인 분단국가형태가 아닌 지리적 통일이 이루어진 국가, 지역과 세대 그리고 계층을 넘어서 전 국민이 하나되는 통합이 이루어지는 모습일 것이다. 이를 위해 당장의 우리 앞에 놓인 최고의 과제는 국민화합과 통일문제이고 어쩌면 이 운동에 나서라는 것은 동학혁명 선배들의 명령일 것이다.
금년 10월 11일은 동학혁명이 전국화하는 총기포령이 내려진 9월18일의 양력이다. 그날 전국의 동학혁명 관련 단체들이 대규모 기념식을 준비하고 있다. 이날을 기해 그동안 호남만의 동학혁명이 아닌 전국의 동학혁명으로 바뀌는 계기로 만들고, 동학군과 싸운 관군과 심지어는 일본군의 후손들까지 참석해 화해의 장을 만들어야 한다.
임형진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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