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년월일을 순차적으로 이어붙인 주민등록번호. 그러기에 위조하기가 쉬워 주민등록번호 생성기라는 것도 진즉 생겨났다. 주민으로 등록하지 않으면 그만이겠지만 그러면 이 땅에선 투명인간이 되어야 하니 안 할 수도 없다. 주민등록번호만 넣으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는 세상. 편리한가? 그걸 부리는 자들은 편리하겠지. 그러나 늘 호출당하고 노출당해야 하는 대다수 사람들은 끔찍하다. 최근 금융기관의 개인정보 유출. 마침내 올 것이 왔다!
숫자가 자신을 대신한 지 오래다. 은행이나 병원 등 접수 창구가 있는 곳이면 당연히 있는 번호표. 어디를 가든 우리는 이름 대신 번호로 지칭되고 호칭된다. 감옥의 수인들도 번호로 불린다. 그 옛날 일제 강점기 때 감옥에 갇힌 이육사 시인은 수인번호가 ‘264’여서 본명 ‘이원록’ 대신 이육사를 썼다고 하는, 그럴싸한 얘기도 있지 않은가? 그러고 보면 번호의 뿌리는 깊다.
이제쯤 번호를 내려놓고 싶다. 한때 주민등록증 대신 운전면허증 같은 것으로 신분증을 대신하자는 운동이 있었다. 하지만 주민등록증 대신 운전면허증을 내민다고 주민등록번호가 사라질까? 운전면허증도 주민등록번호와 사진이 나를 대신한다. 어느새 통제와 관리 대상이 되어버린 인간들. 번호가 있어 통제하고 관리하기에 편하다고? 주민등록번호가 어떻게 되시지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발가벗겨지는 기분이다. 나만 그러지 않을 것이다. 나는 얼마나 더 유출되어야 내가 다 없어질까?
사람을 다 까발려 감시하는 주민등록번호라는 괴상한 숫자만이 문제가 되는 건 아니지만 주민등록번호의 폐해가 가장 심각하다. 예전엔 병원에 가면 의료보험카드를 내밀어야 했는데, 지금은 주민등록번호만 대면 된다. 그러면 접수처 컴퓨터에 내가 무슨 병으로 병원에 들렀는지, 언제 다녀갔는지 쫙 뜬다. 마음 놓고 아플 수도 없는 세상이다.
약간 큰 건물 주차장에 차를 몰고 들어 가면 차량 번호가 자동으로 인식되어 내가 언제 들어가는지 다 안다. 나와 차는 숨을 곳이 없다. 집을 나서도 카메라, 길을 가도 카메라, 전철을 타도 카메라, 버스를 타도 카메라, 건물을 들어가도 카메라다. 내 일거수일투족을 다 감시하고 있는 카메라. 이것도 나를 불편하게 한다. ‘숨어 있기 좋은 방’을 애써 찾아나서야 하나?
어릴 적엔 학교 갔다 오다가 보리밭이나 나락밭 두렁에 퍼질러 앉아 해질녘까지 노을을 바라보아도 되었고, 큰 소나무 그늘 아래에서 땀을 들이며 누워 졸아도 되었고, 비를 피한다며 큰 바위 아래에 들어가 한나절을 보내도 되었다. 그렇게 해도 하늘과 바람 말곤 나를 지켜보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숨을 데가 없다.
숨고 싶다. 비밀을 간직하며 살고 싶다. 시인 이상은 ‘비밀이 없다는 것은 재산 없는 것처럼 가난하고 허전한 일’이라고 했지만 프랑스 소설가 파스칼 키냐르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는 ‘은밀한 생’이라는 소설에서 ‘영혼을 가진다는 것은 비밀을 가진다는 것을 의미한다’라고 했다.
우린 지금 비밀을 가질 수 없으므로 가난하고 허전한 정도가 아니라 영혼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파스칼 키냐르 말마따나 영혼이 없다는 얘기이다. 맞는 말씀인 것 같다. 현대인은 영혼이 없다….
박상률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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