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춘추] 여백을 살리자

겨울이다. 시린 손 호호 불며 썰매 타던 생각이 난다. 눈이라도 오는 날이면 눈싸움 하랴, 눈사람 만들랴, 눈 코 뜰 새가 없었다. 그래도 내 집앞과 마을길을 사람들이 다닐 수 있도록 눈을 치웠다. 누구라 할 것도 없이 시간이 있는 사람이면 내 일 네 일 가리지 않았다. 차가운 겨울에 땀 흘리며 보여주는 미소는 순진무구 그 자체다. 마음의 풍요로움이 가득해서 가능했으리라.

겨울에 맛보는 진미는 여백을 느끼는 것이다. 한 겨울의 흰 눈은 때 없이 묻어나는 자연의 진미를 느끼게 한다. 자연 속에 홀로 서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도 눈 쌓인 겨울이다. 겨울이 만든 여백은 숨을 쉬기 때문이다, 봄, 여름, 가을은 여백을 느끼지 못한다. 세상이 차오르는 계절이기에 여백을 느낄 시간조차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우리는 바쁘게 살고 있다.

이번 겨울에는 여백을 느껴보자. 여백이 있어야 매화가 살고 난이 살고 국화가 살고 대나무가 산다. 선비정신과 여백은 깊은 사연이 있을 듯하다.

 선비정신은 정직을 바탕으로 고결함을 추구한다. 여백은 본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으면서 존재의 물상을 살아 숨 쉬게 한다. 선비정신과 여백은 이타행을 실천하는 동질성을 공유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여백이 없다면 사군자는 이미 죽었을 것이다. 여백은 빈 자리가 아니라 모두를 살아 숨 쉬게 하는 자리다.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며 숨 쉴 공간이 없을 만큼 우리의 삶은 여백이 없다는 느낌이 든다.

소통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 말이 많아진 세상에서는 소통이 될 수가 없다. 들어주는 이가 없기 때문이다. 들어주고 싶어도 들어줄 공간인 여백이 없기 때문이다. 소통도 여백이 남아있을 때 가능한 것이다. 서로가 참고 기다리면 소통은 절로 된다. 설득은 소통을 가로막는 큰 장애물이다. 설득은 이해관계를 양산하기 때문에 휴유증을 가져온다.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틀림을 강조하는 것도 큰 장애물이다. 어린 시절 배웠던 틀림이 어른이 된 지금도 고착화되어 틀림으로 고정시켜 놓은 것이 내 생각 외엔 다 틀린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만들어놓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틀림도 모르고, 다름도 모른 채 눈 내리면 그저 좋았던 어린 시절이 몹시 그리운 것은 나뿐일까. 여백으로 인해 사군자가 숨을 쉬듯이 우리가 함께 사는 세상도 숨을 쉬려면 여백을 만들어내야 한다. 어린 시절 아무도 모르게 자연속에서 자연스럽게 배웠던 여백의 철학을 오늘 다시 배운다.

우호철 화성문화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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