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면서] 거대 정당의 꼼수, 투표용지 기호배정 방식

우리는 곧잘 ‘정의’와 ‘공평’을 목소리 높여 주장하면서도 익숙한 것을 당연한 것으로 믿는다. 선거에서 의석수순 방식으로 전국을 통일하여 기호배정을 하는 것도 그렇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여기에 정의롭지도 공평하지도 않은 검은 카르텔이 존재한다. 투표용지 기호배정 방식의 변화를 살펴보면 권력행위자와 그들의 권력관계에 따른 산물이지 결코 정의롭지도 공평하지도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현행 선거법상 투표용지 기호배정 방식에서 제1당과 제2당은 모든 선거구에 후보를 추천하기 때문에 1번과 2번의 기호를 받지만 모든 선거구에서 후보를 내지 못하는 군소 정당은 선거구별로 투표용지 기호가 달라진다. 다시 말해 새누리당과 민주당은 당연히 전국적으로 1번과 2번의 기호를 부여받지만 그밖에 군소 정당들과 무소속 후보들은 선거구별로 기호가 달라진다. 공평하지 못한 제도다.

정치 지체를 부추기는 문제도 있다. 현행 방식은 기성 제도정치권이 아무리 욕을 먹어도 선거에서는 투표용지 기호배정 방식으로 거대 정당이 1, 2위를 싹쓸이 할 수 있었다. 다수의 유권자들이 관행적으로 1번과 2번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의 대부분의 선거에서 기성 제도정치권에 대한 유권자들의 실망과 질타가 이어짐에도 불구하고 애당초 기대하였던 대안세력의 약진과 정치 독과점 완화의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던 주요 원인 중에 하나가 기호배정 방식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기성 제도정치권이 스스로 정치개혁을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이 오랫동안 변함없이 적용되었는데 과민반응을 하는 것은 아닌가. 그렇지 않다. 과거에는 공정한 선거를 치르기 위해 추첨으로 기호를 정했다. 기호추첨과 의석수순에 의한 통일기호 부여방식을 오갔다. 다만, 현행의 방식으로 고착된 것은 1987년 민주화 이후 진행된 당시 민주정의당과 통일민주당의 ‘8인 정치회담’의 결과였다. 당시 해체위기를 벗어나려는 민정당과 개헌의 주도권을 쥐려는 민주당에 의해 권력 나누기의 이해가 작동한 것이다.

일본과 미국 등 외국에서도 우리와 같은 투표용지 기호배정 방식을 적용하고 있을까. 아니다. 선거 결과를 인위적으로 왜곡하지 못하게 철저한 무작위 추첨방식을 사용한다. 일본의 지방선거는 투표결과 왜곡의 문제 때문에 유권자가 투표용지에 직접 후보의 이름을 쓰도록 하고 있다.

미국의 일부 주는 후보자의 게재순서를 투표용지마다 기계적으로 바꿔 기호 순번이 빠를수록 당선이 유리한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 그리고 일부 국가에서는 투표용지가 원형으로 되어있어 기호1번과 기호2번의 프리미엄을 사전에 차단하고 있다.

이와 같은 투표용지 기호배정 방식으로 치러지는 선거를 두고 누가 정의롭고 공평한 선거를 치르고 있다고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을까. 기성 제도정치권이 민의를 충실하게 이행하지 못한다면 이를 대체할 새로운 정치세력이 부상할 수 있는 제도가 마련되어야 유권자의 명령, 국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우리지 않겠는가. 그래서 비민주적이고 오만불통의 정치가 가능한 이 제도부터 뜯어고쳐야 한다는 것이다.

선거는 공평하고 정의로워야 한다. 공평하지 못한 선거법은 위헌이다. 선거결과는 민의가 투영되어야 한다. 왜곡되어서는 안 된다. 선거결과를 왜곡시키는 현재의 투표용지 기호배정 방식은 유권자의 매서운 회초리를 교묘하게 피해가려는 거대 정당의 꼼수임을 고발한다.

이광재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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