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평범성’이라는 말을 떠올리자 노출증과 관음증의 ‘평범성’이라는 말이 같이 따라 나온다. 요즘 사람들이 즐겨하는 트위터와 페이스북을 보자. 그걸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거기에 글을 쓰거나 사진을 올린 사람이 ‘지난 여름’에 무슨 일을 했는지를 다 알 수 있다. 누가 묻거나 알고 싶다고 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다. 자기 스스로, 자신을 노출 시킨다. 노출의 평범성이다. 노출이 일상화 되어 있다. 자기 자신을 보여주지 못해 안달이다.
관음증은 어떤가? 사람은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에 대해 관심이 많다. 그래서 예로부터 사랑방이나 우물터나 빨래터의 ‘수다’가 있었고, 텔레비전의 연속극이 인기를 끌었다. 그게 트위터와 페이스북으로 이어졌다고 본다. 지금은 어떤가? 누군가의 사생활을 ‘씹어야’ 심심하지 않고 자신이 위로가 되는 세상이다. 대중은 관음증을 ‘평범하게 일상적으로’ 소비하고 있다.
트위터는 장터에 나가서 거기 모인 사람들에게 말을 걸고 소리치는 것과 닮았다. 페이스북은 저녁에 사랑방에 마실 가서 하루 종일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말하거나 타인의 소식을 듣거나, 아침에 샘가에 물 길러 가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과 같다.
지상에서 겨우 마흔 살을 살고 간 카프카가 작품 수보다 훨씬 더 많게 천 통 넘는 편지를 남긴 것은 무얼 의미할까? 편지의 수신인은 친구, 연인, 가족, 일과 얽힌 사람들이었다. 그걸 이상한 열정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그도 작품으로 쓰지 못한 노출증과 관음증에 빠져 있지 않았을까? 자신을 노출 시키고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는 게 되레 작가와 독자의 거리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방식이 되기도 했을 것이다….
자기의 사후 저작물을 다 불 태우라고 친구에게 부탁한 그의 심정이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이야기의 시대이다. 사람들은 이야기에 목매고 있어 남의 이야기만으로는 양이 차지 않는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한다. 이야기 속에는 노출증과 관음증이 같이 들어 있다. 작가는 둘을 잘 버무려 좋은 이야기가 되게 하기도 한다.
그 반면에 국정원 같은 ‘빅 브라더’는 평범한 노출증과 관음증에서 어마어마한 이야기를 만든다. 이른바 억압하기 위한 조작이다. 노출증과 관음증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자유 의지인데 말이다. 어떤 억압도 인간에겐 필요하지 않다. 그럼에도 빅 브라더 같은 기관들은 억압 하고 싶어 한다. 그런 기관들의 부당한 명령을 그대로 실행하는 이는 뜻밖에도 아이히만 같은 인간들이다. 주변에선 다 사람 좋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 생각 없이 살았기에 악의 편이 되었다.
그래서 95살로 거의 한 세기를 살고 간 스테판 에셀은 90살 넘어서 ‘분노하라’는 에세이를 썼을 것이다. 자신이 나치에 저항한 레지스탕스이기도 했지만 다른 사람과 사회에 대해 무관심한 이들을 보면 늙은 몸의 피도 끓었다. 악은 평범하다. 그러나 그 결과는 참담하다. 일찍이 김수영 시인은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라고 탄식조로 노래했다. 평범하게 사는 게 결코 생각 없이 사는 걸 말하는 게 아니다.
박상률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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