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춘추] 배려의 문화를 만들자

함께 하면 할 수록 세상은 아름다운 곳이다. 몇 년 전의 일이다. 장애가 심했던 후배가 장애우들이 사회에서 차별 받지 않고 살아가는 방법을 찾고자 동분서주하며 재활센터 겸 야간학교를 만들어 많은 노력을 했는데 선뜻 그 뜻을 받아주는 분이 없어 나에게 도움을 청했던 적이 있다.

그들이 건강하게 사회인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기관단체지인 등과 함께 노력하며 2년 동안 후원회장직을 수행하면서 동고동락을 했다.

지금은 야학 컴퓨터교실 극단운영 등 눈부신 발전을 가져와 건강하게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이렇듯 세상은 조화를 이루며 아름다운 행복을 우리에게 선물하고 있다. 아름다운 세상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사회에 대해 불만이 있다는 것은 개인적인 욕구의 불충분에서 오는 것일 수도 있지만 사회적 모순에서 발생하는 경우가 더 많을 수도 있다.

우리가 향유하고 있는 문화는 보이지 않는 먼 미래에 대해 몸부림치며 변화를 갈망한다. 그래서 문화는 쉬지 않고 변화를 거듭한다. 변화의 주된 목표는 사람의 행복일 것이다. 이 행복이 세상과 사회와 개인에게 괴리가 생길 때 사회적 문제가 싹틀 수밖에 없다.

 

우리는 지금 정신문화의 가치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깨닫고 있다. 올바른 심성을 되찾기 위해 유교의 인의정신, 불교의 자비정신, 기독교의 박애정신을 통해 자기성찰을 이뤄 인간본연의 평상심을 되찾고자 노력하고 있다.

팽창주의가 불러온 산업사회는 인간의 심성에 치유되지 않는 상처를 남겨 놓았다. 도시화와 산업화는 도덕의 끈으로 연결돼 있던 우리라는 공동체를 붕괴시키면서 자신만을 위한 가치 추구와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해왔고 이로 인해 공동체가 아니라 내편 만들기에 아우성이 됐다.

과학의 급속한 발전은 배려하는 방법은 가르쳐 주지 않았다. 언론에 자주 등장하는 나눔의 문화는 배려의 문화로 성숙돼야 한다. 배려의 문화를 일궈 냈던 경주 최 부자는 다시 볼 수 없는 것인가.

자기를 극복해 예로 돌아가자고 공자님은 극기복례(克己復禮)를 수천년 전에 주장하셨다. 나의 건강한 정신이 사회의 건강이고 나라의 건강임을 설명해주신 글귀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사회는 시대의 환경만 바뀌었지 같다는 의미로 다가온다.

세상에 대해 감사하는 배려가 가끔 언론을 통해 보도된다. 우리를 감동시키는 수호천사들의 덕행이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가고 있다. 배려의 문화는 감성을 자극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감동하는 것이 아닐까.

우호철 화성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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