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세 노세 젊어서 놀아/늙어지면은 못노나니/화무는 십일홍이요/달도 차면 기우나니라~
이런 노래가 있었다. 한두 구절이 민요 가락에 실리기도 하였지만 나중에 유행가 가락에 실려서 더 유명짜해진 노래이다. 노래대로라면 ‘젊어서’ 놀아야 한다. 맞는 말이다. 늙으면 놀기 힘들다. 노는 것도 일하는 거와 마찬가지로 힘이 있을 때 해야 한다. 그러니 젊어서 놀아야 한다. 열흘 붉게 피어 있는 꽃도 없고, 달도 보름달이 되면 바로 반달이 되고 마침내 초승달로 기울어지는 법.
어른도 노는 게 즐겁다. 오죽하면 ‘놀이하는 인간’이라는 말이 생겼을까? 그런데 아이들은 놀이 자체가 세상을 배우는 일이다. 놀이는 익히 알다시피 승부가 있는 것과 승부가 없는 것으로 나뉜다. 예전의 아이들은 승부가 없는 소꿉놀이 같은 걸 통해 사회와 인생을 배웠다. 이른바 가상현실을 통해 실제현실을 이해한 것이다. 근데 어른들은 화투 등 승부를 가르는 놀이를 즐겨한다. 삶 자체가 놀이를 ‘잊은 지 오래고’ ‘대결 구조’이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 이제는 아이들도 컴퓨터 게임 등 승부에 집착을 하는 세상이 되고 말았지만….
하 그런데, 칠레의 민중 시인으로 잘 알려진 네루다가 이런 말을 했네. ‘나는 집에다 크고 작은 장난감을 많이 모아두었다. 모두 내가 애지중지 여기는 수집품이다. 놀지 않는 아이는 아이가 아니다. 그러나 놀지 않는 어른은 자신 속에 살고 있는 아이를 영원히 잃어버리며, 끝내는 그 아이를 무척이나 그리워하게 된다. 나는 집도 장난감처럼 지어놓고, 그 안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논다.’
그런 그이기에 (그의 사후에 나온 ‘질문의 책’이란 시집에 제목 없이 숫자로만 나열 되었지만) 이런 시를 남겼으리라.
나였던 그 아이는 어디 있을까,/아직 내 속에 있을까 아니면 사라졌을까?//내가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걸 그는 알까/그리고 그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걸?//왜 우리는 다만 헤어지기 위해 자라는데/그렇게 많은 시간을 썼을까?
서울 광화문 복판에 있는 어느 서점은 서점 건물 벽에 ‘나였던 그 아이는 어디 있을까, 아직 내 속에 있을까 아니면 사라졌을까?’ 대목을 발췌하여 한 계절 내내 내걸어서 오가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 속의 아이에 대해 생각을 해보게 하였다. 나는 완전히 이별하여 떠나보내지 못한 내 속의 청소년 때문에 청소년소설도 쓴다고 늘 말한다. 맞는 말이지만, 아직 그가 내 속에 남아 있다면 그가 떠날 것을 바랄 게 아니라 더욱 사랑해야 하리라.
내 개인적으론 문예창작 수업 시간에 늘 영화 ‘일 포스티노’를 틀어주었다. 익히 알다시피 영화 ‘일 포스티노’는 네루다를 다룬 영화로 ‘은유’를 배우기에 딱 좋다. 이제 은유를 넘어서서 ‘노는 아이’에 대해 관심을 더 가져야겠다. 늙어서도 놀고 싶은 아이. 그 아이가 어디로 갔는지….
아인슈타인도 ‘물리학자는 피터팬이어서 더 이상 자라선 안 된다’고 했다. 물리학에서조차 그걸 잘 연구하려면 호기심을 간직하고 있어야 한다는 얘기이리라. 이는 단순히 몸집만 커졌지 무책임한 짓만 하는 어른을 이르는 말이 아니라, 어른이 되더라도 아이 같은 호기심을 같이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리라. 그렇다면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라는 말은 늙더라도 젊었을 때의 호기심 같은 걸 잃지 말라는 뜻으로 다시 해석해도 될 터!
박상률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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