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소외된 이들은 삶의 목표나 존재의 의미를 상실한 불행한 이들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추사 김정희가 제주 귀양시절 기득권 모두를 잃은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국보 제180호 ‘세한도(歲寒圖)’와 ‘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 등 불후의 명품을 남겼으니 걸작은 반드시 좋은 환경에서 탄생하는 것은 아니다.
표암 강세황(1713.윤5.13~1981.1.23)의 아버지 강현(1650~1733)은 84세의 수를 누렸고 슬하에 3남 6녀를 두었다. 64세 때 서울 남소문동에서 낳은 막내가 다름 아닌 강세황이다. 노년에 얻어 손자보다도 어린 자식이니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금지옥엽 그 자체였다.
표암은 15세에 진주 유씨와 결혼해 17세에 장남 인을, 55세 때는 서자 신 등 아들만 다섯을 두었으니 첫째와 막내의 나이 차는 38년에 이른다. 32세 때는 처가인 안산으로 내려와 그곳에서 30년 가까이 머물렀다.
그에게서 백수시절이 사뭇 오래이나 그 긴 세월은 결코 무의미한 것은 아니었다. 학문과 예술 전반에 두루 전념, 오랜 사색과 연찬(硏鑽)이 이루어진 값진 시절이었다.
환갑을 맞이한 해에 비로소 관직에 나갔으니 출사(出仕)는 사뭇 늦다. 61세 영릉참봉으로 첫 벼슬길에 오르고 그해 서울로 다시 이주한다. 27년 가까운 관직생활 중 72세 때는 청 건륭제(1711~1799) 천수연에 부사로 북경을 다녀왔고, 71세와 77세 두 차례 오늘날 서울시장인 한성부판윤을 역임하는 등 노익장을 과시했다.
무더위가 대단했던 올 여름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18세기 예원의 총수’로 지칭되는 표암의 탄생 300주년을 맞이해 ‘표암 강세황 시대를 앞서간 예술혼’(6.25~8.25)이란 제목으로 대규모 특별전이 열렸다. 이 전시에 앞서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지금 글 쓰는 이가 기획한 ‘1월의 문화인물 강세황 특별전’(1995.1.30~2.12)이, 이어 8년 뒤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서 ‘표암 강세황푸른 솔은 늙지 않는다’(2003.12.27~2004.4.2)가 열렸다.
대체로 10년 단위로 전시가 개최된 셈이다. 훌륭한 전시는 충분한 연구가 이루어진 뒤 비로소 가능하다. 표암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로는 현 문화재청장인 변영섭 선생에 의해 이화여자대학교에서 1987년 6월 발표된 박사학위 논문을 비롯해 그의 시서화에 대한 논고 등 시문학 및 작가론과 작품론 및 산수ㆍ초상ㆍ사군자ㆍ화회초충 등 회화의 장르별 연구가 다수 발표됐다.
시간의 물리적 계량치는 모두에게 평등하다. 그러나 그것은 돈의 가치만큼이나 천차만별이니 사람에 따라 전혀 다른 수치로 다가온다. 그냥 흘려보내는 것일 수도 있으나 채워나가는 것이기도 하다. 시간의 흐름은 부패의 악취를 동반하는가 하면 발효의 향기를 뿜기도 한다. 성장이 멈추었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니 성숙이 이루어진다. 우리는 표암에서 이를 엿보게 된다.
표암이 71세에 그린 ‘자화상’은 옥색 도포에 관모를 쓴 우습고 다소 시니컬한 좌상이다. 관직에 몸담았으나 마음은 삼림에 있다고 제사로 피력했다. 우리 옛 초상화는 그림으로 예술적인 성취와 초라함 아닌 그야말로 의연하며 관조의 여유와 탈속 등을 진솔하게 드러내 아름답고 감동적인 것은 아닌지. 얼굴은 살아온 삶의 기록 그 자체이다. 나이 40이면 자신의 얼굴에 책임지라고 링컨이 말했듯, 얼굴은 타고나는 것에 더하여 만들어가는 것이다.
이원복 경기도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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