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춘추] 고향의 추억과 애환

며칠 있으면 추석을 맞는다. 설과 추석에는 고향을 찾게 된다. 고향은 태어나서 자란 곳, 마음속에 깊이 간직한 그립고 정든 곳이다. 필자의 고향은 화성시 우정읍 원안리 바닷가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어린 시절 여름이면 마을 앞바다에 나가 수영도 하고 개펄에서 미끄럼 타며 놀았던 추억이 되살아난다. 누구나 고향은 있게 마련이다. 남북분단으로 갈 수 없는 고향, 갈 수는 있되 수몰되거나 택지개발로 원형을 상실한 고향, 도시화로 변화된 고향, 잘 남아 있는 고향이 있을 것이다.

평화로운 마을의 아픈 역사는 한국전쟁으로부터 시작된다. 1951년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군은 매향리 농섬을 사격장으로 이용하기 시작했다.

어릴 적 기억은 주로 저녁에 사격훈련을 했다. 전투기가 농섬에 폭탄을 투하하기 위해서는 45도로 내려가다가 폭탄을 투하하고는 다시 45도로 상승할 때의 뿌~우~응하는 소음과 꽝하고 폭탄 터지는 굉음은 고막이 터질 듯한 소리를 내곤 했다.

사격장과 4km도 안 떨어진 우리 마을도 소음에 시달리곤 했다. 야간사격을 할 때는 조명탄을 대낮 같이 밝히며 쏘아 올려 밤을 잃어버릴 것 같은 시절도 있었다. 매향리 사격장은 54년 만인 2005년에 사용금지 되었는데 약속사항인 평화공원은 아직도 조성되지 않고 있는 현실이다.

또 한 번의 아픈 역사는 1968년 1월 21일 북한 무장공비들의 청와대 습격사건이다. 김신조 일당 31명의 청와대 습격사건은 국방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그 해에 예비군이 창설됐다.

그리고 우리나라 전 해안에는 철조망이 둘러쳐졌다. 어민들은 출입증을 발급받고 출입 허가를 받아야 바다로 갈 수 있었다. 아이들도 지척에 바다를 두고 들어갈 수 없어 새장에 갇힌 생활을 해야 했다.

2005년 사격장이 문을 닫아 폭탄 터지는 소리와 비행기 굉음은 들리지 않았다. 속담에 여우를 피하자 호랑이를 만난다고 했던가? 폭격소리가 멈추고 철조망이 걷히자 이번에는 바다를 송두리째 빼앗아 가버렸다.

90년대 제2의 시화호가 될 것이라는 우려와 반대에도 농림당국과 농업기반공사는 방조제공사를 강행했다. 이곳 바다는 2000년대까지만 해도 맛살, 바지락, 굴, 꽃게 등 각종 생선이 전국 제일가는 어장이어서 어린 시절을 이 일대에서 보낸 사람들에게 잊지 못할 고향의 맛과 추억을 안겨준 곳이다.

평화로운 마을에 미군사격장이 들어선 것을 시작으로, 철조망이 쳐져 눈요기만 하는 바다로 변했고, 이윽고 방조제 사업으로 바다를 통째로 잃고야 말았으니 이런 아픔이 또 어디 있을까 싶다. 화옹방조제 사업이 성공적으로 마무리 되어 꿈의 낙원이 되길 기대해 본다.

/김충영 수원시청소년육성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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