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말은 권불십년(權不十年)에까지 이어져 영원한 권력이 없다는, 권력의 무상함을 일컫는 뜻으로도 사용된다. 그러나 사람들은 꽃이 피었던 그 열흘의 자태로 그 꽃나무를 기억한다. 겨우 열흘 붉었던 꽃이 바로 그 나무의 이름이 되는 것이다.
꽃나무를 가만히 들여다보자. 1년 내내 꽃을 매달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어떤 꽃나무라 할지라도 1년 내내 꽃을 매달고 있는 꽃나무는 없다. 1년 가운데 꽃 피는 기간은 기껏해야 열흘 남짓이다. 1년 가운데 나머지 기간, 즉 350여 일은 꽃을 피우고 열매 맺기 위해 준비하거나 시들어가는 기간이다.
꽃나무는 우선 뿌리를 땅에 내리고 얼마큼 자라야 한다. 자라는 과정에서도 시련이 많다. 온갖 병충해에 시달려야 하고 비바람도 이겨내야 한다. 그렇게 해서 어렵게 꽃을 피운다. 그리고 이내 곧 시들어간다. 하지만 꽃은 그 열흘 때문에 그 꽃나무의 이름을 얻는다.
꽃들이 그가 피운 꽃으로 기억된다면 대부분의 새들은 일단 ‘우는 소리’로 기억되어 ‘우는 소리’가 그 새의 이름이 된다. 그런 까닭에 새는 흔히 제 이름을 부르며 운다고 한다. 새들은 우는 소리에 따라 이름이 불려지기 때문이다.
뻐꾹뻐꾹 하고 울면 뻐꾸기. 까악까악 하고 울면 까마귀…. 물론 우는 소리가 아닌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람들은 새들의 소리는 무조건 운다고 느낀다. 새들의 소리는 그들의 의사소통 도구로서 언어인지도 모르다. 아니면 웃음소리인지도…. 어쨌든 꽃은 피어난 자태로, 새는 울음소리로 사람의 기억 속에 들어간다.
그럼 사람은 무엇으로 기억될까? 대부분의 사람은 성공하려고 애쓴다. 사람마다 성공의 기준이 다르지만 어쨌든 자기 분야에서 성공하고자 한다. 다른 사람의 기억 속에는 그가 이런저런 어려움이 있었음에도 성공했다면 오로지 그 성공만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사람은 그처럼 간단한 존재가 아니다. 남은 쉽게 재단하고 규정해버릴 수 있어도 자신은 그러지 않는다.(못한다!). 사람은 무엇보다도 한때(특히 젊었을 때)의 추억으로 한 평생을 사는 것 같다. 그래서 인생의 부자는 재산이 많은 이가 아니라 추억이 많은 이라고 말해지기도 한다. 몸에 박힌 한때의 기억으로 한평생을 살 수 있는 힘을 얻는 게 사람이다. 자신은 한때의 추억을 자신의 전부라고 느끼지만 남은 그런 건 아랑곳하지 않는다. 오로지 그의 지금 현재를 보는 것, 그의 성공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
사람은 현재의 상태를 두고 평가되지만, 그렇게 평가되는 그 자신은 자신의 ‘속 모습’을 알고 있다. 자신의 정체성으로 가장 내세우고 싶은 것, 내세워야 하는 게 무엇인지 안다. 사람의 젊은 시절 한때는 그야말로 쏜살같이 지나간다.
어쩌면 그 젊은 시절이 지금의 상태가 어떠하든 그 사람의 가장 화려한 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 순간을 막 살아선 안 되리라. 평생의 밑천이 되기도 하고, 자신의 전부로 여겨질 수도 있는 게 그 순간인 것을. 남은 성공한 현재의 모습으로 자신을 기억하더라도 자신은 지금의 성공보다 더 화려했던 자신의 시절(자신만의 꽃이 피던 시절!)을 알고 그걸 기억한다.
저마다 간직하고 있는 화려한 시절은 자신만이 안다. 화려하다고 느꼈던 그 순간이 그 사람의 정체성이다. 근데 최영미 시인이 노래한 것처럼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이다.
박상률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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