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면서] 뮤직박스

오래 전 의미있는 영화를 한 편 보았습니다. 1990년도에 개봉한 코스타 가브리스 감독의 ‘뮤직박스’라는 영화였습니다. 줄거리는 간단합니다. 유대인 학살의 전범이었던 인물이 미국에 이민와 과거를 숨기고 살아가다 법원으로부터 전범이니 그에 합당한 재판을 받아야 한다는 통지를 받게 되면서부터 시작됩니다.

변호사인 딸이 아버지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고군분투한 결과 결국 자신의 아버지가 무죄라는 걸 입증하죠. 무죄 선고를 받는 날 파티를 여는데 전범의 딸이 아버지의 뮤직박스 속에 감춰져 있던 사진을 발견합니다. 그 사진은 자신의 아버지가 유대인들을 학살하는 장면이었죠. ‘뮤직박스’는 딸에게까지 진실을 밝힐 수 없는 삶을 살아온 한 전범의 이야기입니다.

요즘에도 미국이나 이스라엘 등지에서 나치 전범에 대한 전시회나 영화 등이 만들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미 많은 세월 흘러버린 과거이지만 인간으로서 저질러서는 안 될 죄에 대해 끝까지 단죄하겠다는 정의의 의지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가 하필이면 제가 연희문학창작촌에 들어온 뒤 새록새록 떠올랐다는 겁니다. 저는 요즘 서울 연희동에 있는 연희문학창작촌에서 글을 쓰고 있습니다. 첫 날 창작촌의 직원이 창작촌 안내를 해주었습니다. 그때 창작촌 내부에 있는 커다란 대문을 하나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곳이 전두환씨 경호를 맡고 있는 경호주택으로 이어지는 대문이라고 하더군요.

아, 한때의 역사를 피로 물들인 장본인이 사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자 씁쓸하더군요. 아직도 뒤틀린 역사가 바로 세워지지 못한 채 시간만 흘러갔다는 사실 때문에 조금은 서글프기도 했지요. 그런데 늦게나마 그에 대한 추징법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요즘 연희동 골목은 시끌시끌 합니다. 진즉 단죄했어야 할 일이 너무 늦지 않았나하는 생각도 들더군요.

하지만 재산을 이리 저리 해서 환수를 한다한들 그에게 희생당한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이나 슬픔, 한 등이 치유될 수 있을까요? 그냥 이렇게 흘러가버리고 마는 걸까요? 시간이 흘러버리면 만사가 흐지부지되고 마는 게 이 세상의 법칙인가 봅니다.

제가 처음 쓴 소설이 있습니다. 그 소설의 주된 내용은 제 자신이 용기없고 혹은 욕망에 찌들어 살면서 저질렀던 수많은 죄들에 대한 반성의 의미를 담아냈습니다. 이미 잊혀졌고 누구도 기억하지 못할 일이지만 제 자신이 용서하지 못한 일들이었기에 그렇게라도 사죄하고 싶었던 거지요. 그게 인간으로서의 예의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건 남들이 몰라줘도 상관은 없을 겁니다. 남들에게 사죄를 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자신에게 먼저 사죄를 하면 되지 않을까요? 돌이켜 생각해보면 자신에게 사죄하는 일은 남들 앞에서 사죄하는 일보다 더 큰 용기가 필요한 듯합니다. 누구도 간섭하지 않기에 거짓이 아닌 진심으로 사죄를 해야 하기 때문이죠. 그리 생각해보면 옆 집에 사시는 분은 용기가 없는 분인 듯합니다.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는 불끈 일어서던 용기도 사죄를 하고 사과를 할 때는 용기를 내지 못하는 분이신 거죠. 그건 어쩌면 우리 역사에 늘 존재해왔던 슬픔일 것입니다. 역사가 바로 서도록 처신하지 못한 문화가 만들어진 잘못이기도 할 겁니다. 사람은 때론 거짓말을 하고 위선을 떱니다. 그런데 거짓말은 거짓말을 낳고 위선은 더 큰 위선을 낳지요. 결국 그 거짓과 위선을 진실인양 받아들이게 되는 순간이 옵니다.

‘뮤직박스’에 등장한 전범처럼 말이죠. 우연히 강풀이라는 만화가 그린 ‘26년’이라는 만화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나마 단죄를 하는 게 가능한 시대라는 거 반갑습니다. 하지만 먼저 당자가 당자 자신에게 진실로 사죄하고 용서를 빌어야하지 않을까요? 옆 집에 사시는 분이 그런 용기를 내기를 바랍니다. 이 땅의 사람들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전민식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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