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면서] 노사의 땅!

지금은 우기. 연일 열대야다. 그러나 내가 사는 초부리 마을은 여전히 꽃대궐이다. 얼마 전 산책길 공터에 누가 모란을 가득 심어놓아서 무작정 가슴 설레기도 했다. 모란꽃 진 뒤에도 한 열흘쯤 눈가에 짙은 꽃물 번지게 하더니, 이번에는 마늘 갈아엎은 자리에 또 누가 도라지꽃 흐드러지게 피워 올렸다. 어쩌다 빗방울 뜨기라도 하면 속수무책 번지는 저 보랏빛 꽃숭어리에 마음 송두리째 빼앗기기도 한다. 그 단단한 맞물림을 땅에서 시작하는 모든 생명들에서 배운다.

연하게 피었다가 연하게 돌아가는 꽃들의 일생. 그러나 저 속에서도 삶과 죽음은 치열해서 꽃 한 송이 눈 틔우는 안간힘은 몇만 톤의 힘을 쏟아 붓는 것이라고 하는데. 며칠 전 느닷없이 비 오시고 번개 치는 날 앞마당의 꽃들이 궁금해서 우산 받고 모종 삽 들고 꽃밭에 앉았었다. 이상해라. 재앙처럼 내리는 아우성의 빗줄기 속에서도 끄떡없이 제 모습을 간직하는 꽃 이파리들. 빨강은 빨강으로 노랑은 노랑으로 꽃들은 더 선연하게 색을 품고 있었다. 뱃속에 아기를 품고 있는 엄마들의 붉디붉은 입술처럼 꽃들은 단단하게 제가 저를 붙들었다. 총탄처럼 퍼붓는 비를 온몸으로 막아서는 저 꽃들의 저항은 무엇일까.

난생처음 시골에서 살면서 흙에서 나는 모든 것들의 경이를 손끝으로 맛본다. 요즘은 열심히 땅을 기어서 열매를 맺고 있는 호박이랑, 보랏빛 꽃 꼬투리에서 시작하는 가지가 신기할 뿐이다. 가지 찢어지게 익어가는 탱탱한 토마토와 태양 앞에서 순하게 제 색을 밝히는 붉은 고추. 밭이랑 가장자리에 울타리처럼 버티는 옥수수는 저마다 삶을 받아 열심히 제 생을 살아가는 사람의 살림살이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돌아가는 가, 구름에게 묻기보다는 땅에 묻는 것이 더 빠른 대답이겠다.

어느새 키가 훌쩍 자라 푸른 물결 아름다운 벼 포기들. 언젠가 내 사랑이 알려준 벼꽃에 대한 궁금증. 벼에도 꽃이 핀다는 것을 여러분은 아시는지? 8월에 핀다는 전설 같은 벼꽃을 기어이 만나리라. 나는 매일 남의 집 논두렁에 쪼그려 앉아 아직 없는 벼꽃 소식에 눈독 들인다. 한편으로는 여름이 농익어서 튼실해진 오이를 얻어서 소박이김치를 담글까 오이지를 만들까 고민하는 여름날, 친구 손잡고 따라간 노사의 땅.

날이 풀리자 친구는 땅을 갈아엎기 시작했다. 산허리 비탈진 곳에서 손바닥만 한 땅뙈기를 갈기 시작해서 눈으로도 멀리 광개토왕이 땅을 점령하듯, 그렇게 해 종일 땅에서 살았다. 혼자 그 넓은 땅에 거름을 주고 그 곁으로 그늘막을 지었다. 물을 나르고 좋다는 퇴비를 구해서 밭이랑마다 골고루 사랑을 나눴다. 가끔 넋을 놓고 먼 산을 바라보기도 했다. 그러나 새끼를 어루만지듯 쉬지 않고 흙을 만지면서 땅을 읽기 시작했다.

만물이 흙에서 시작해서 흙으로 돌아가는 섭리에 고운 눈썹을 내리는 듯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서 벌과 나비와 꽃들이 돌아왔다. 하늘에서는 한바탕 비를 퍼붓고, 해탈한 짐승처럼 맑은 해 이마를 보이기도 했다. 삶과 죽음의 연속을 바라보면서 곧 만나게 될 이보람! 순식간에 놓쳐버린 딸아이의 얼굴을 만진다. 오고 가는 바람에도 공손해지는 오늘. 삶과 죽음이 한 통속임을, 우리는 모두 흙에서 나서 흙으로 돌아가는 딱 한 번의 인생임을, 그래서 아름답다고 친구는 말없이도 말을 한다. 잡초를 뽑을 때도 가만가만, 그래도 어미의 마음은 아프다.

비오시고 번개로 하늘이 들끓는 동안 열 번의 글을 마쳤다. 일 년 동안 글을 읽어주신 독자 분들께 감사한다. 여러분의 땅에서는 어떤 작물이 자라나고 있으신지. 부디 물과 바람과 흙과 불의 길에 자유를.

손현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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