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시론] 가슴이 무엇을 원하는지 귀 기울여 볼 때

세상에는 온통 모르는 것뿐이다. 내 마음을 내가 모르겠고, 상대 마음은 더욱 모르겠고, 초 단위로 변동하는 세상일도 모르겠고, 누가 승리자가 될지, 언제 어떤 자연재해가 발생할지 모르고, 하루, 한달, 일년 뒤의 나를 모른다. 현재의 원인을 기초로 미래 결과를 어렴풋이 예측할 수 있다지만, 언제 어떤 변수가 발생할지 몰라, 정확히 알 수 있는 것은 없다.

세상은 온통 모름의 연속이다. 인간은 시간의 흐름을 따르고, 현재 위치한 공간을 벗어날 수 없는 시공의 제약을 받는 유한자다. 유한자인 인간이 미리 알 수 있는 것은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뿐이라고 혹자는 말하지만, 그러나 인간이 유한자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도 우리가 가진 허상은 아닐까? 출생은 시작이 아니라 전생의 연속이며, 삶과 죽음이 하나이며, 죽음은 끝이 아니라 탈바꿈과 환생의 시작일 수도 있지 않은가.

아인슈타인은 움직이는 것이 시간이 아니라 일정한 가속도로 우주 속을 통과해가는 자신이라면, 시간을 “바꾸기” 위해서는 그자신이 한 물체에서 다른 물체 사이의 우주를 통과하는 속도의 비율(즉, 물체 사이의 공간량) 만 바꾸면 된다고 하였다. 만약 빛의 속도에 근접할 수 있다면 그 때의 시간의 흐름은 완전히 달라진다고 말하는 것이 바로 일반 상대성 이론이다.

사실, 시간이란 개념도 인간이 만들어내고 스스로를 그 굴레에 갇히게 만든것 아니겠는가. 어쨌든 시간이라는 것이 예전부터 생각해온 것처럼 불변하는 절대적인 무언가가 아니라, 공간과 공간사이의 이동 속도에 따른 상대적이고 가변적인 하나의 변수일 뿐이라는 것을 밝혀내어 이제 시간은 허상이라는 것이 명확히 밝혀졌고, 앞으로 인간은 공간 또한 허상이라는 것을 과학적으로 밝혀내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시스템과 이성을 논리라 하고, 꿈과 믿음은 허상이라 한다. 그런데 영화 속 매트릭스에서 이성은 허상이고, 믿음은 실존이라고 한다. 질서가 있고, 체계화가 이루어진 우리가 사는 현실세계가 있지만 이 질서 있는 현실은 허상이고, 반면에 질서도 없고 체계화 되어 있지도 않은 또 다른 세계가 오히려 진실이라는 것이다.

1975년 미국의 핵물리학자인 프리초프 카프라는 ‘물리학의 도(道)’라는 책속에서, 마지막 관찰이 끝나기 전까지 미래에 대해 우리가 알 수 있는것은 하나도 없다는 양자역학 이론을 소개하고 있다. 이는 닐 도날드 월쉬의 ‘신과 나눈 이야기’에서도 언급되고 있는데, 이 이론은 원인과 결과가 일치한다는 결정론적 세계관, 선(善)한 행동에 복을 준다는 인과응보(因果應報) 식 사고를 일시에 붕괴시켜버리고 만 것이다.

오로지 알 수 있는 것은 눈으로 보는 최종 상태로서의 현재뿐이며, 내가 쓸 수 있는 것은 현재의 시간과 내가 현재 위치한 공간밖에 없다. 그러나 인류가 진보하면서 인간의 유전자 프로그램에 위기의식이 추가되었고 이로 인해, 우리는 늘 미래를 미리 걱정하고, 현재마저 근심과 걱정으로 자유롭지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현재마저 고민과 고통에 사로 잡혀 현재도 실체가 없는 허깨비로 존재하고 허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영혼이 맑고 강하면 삶과 죽음, 행복과 불행이 하나지만, 영혼이 흐리면 마음의 장난에 믿음이 깨지고, 불행과 불확실을 두려워하고 허상에 놀아난다고 한다. 깊고 멀리 내다보면서 물속의 물처럼 하나로 어울리고자 하는 통찰력으로 나만의 삶을 살아야겠다. 있는듯 없는듯 보일듯이 사라지는, 잡힐듯이 멀어지는 가까우면서도 먼 꿈들 속에서 헤매지 말고 현재의 강한 마음으로 진정 내 가슴이 무엇을 원하는가에 귀를 기울이자.

공경호 오산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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